런던 살인 사건 6 (키아라의 다른 멤버 유라)
김성현 영사는 먼저 나온 피쉬앤 칩스를 자신의 앞으로 당겼다. 영욱과 경태는 감자 칩을 몇 개 먹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이런 걸 먹을 땐 말이야. 주변 것을 먼저 먹고 메인은 나중에 먹는 거야. 칩스를 먼저 먹고 나중에 피쉬를 먹는 거지. 샐러드 먼저 먹고 피자 먹는 거고. 파절이 다 먹고 소고기 불고기를 먹고. 뭔 말인지 알지?"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영욱은 솔직하게 말했다. 먹고 싶은 것을 먼저 먹으면 되는 거지 무슨 큰 법칙이나 있는 듯 말하는 김 영사가 꼴불견이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적 말이야. 새우깡을 먹으면 밑에 쪼끄마한 부스러기 조각들이 남는다고 그건 꼭 내가 먹어줘야 제맛이었지. 이거 이해하면 아재래. 자네들은 잘 모르겠군. 불쌍해. 사는 재미를 모른다고나 할까."
"형님, 형님 때문에 집중이 안 돼요. 조금 조용히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김성현 영사는 처음 오는 펍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반면 연인(戀人)이 죽어서 상심하고 있던 조경태는 이런 김영사가 성가신 것 같았다.
“매니저님, 침착하시고 핸드폰 통화내역을 좀 봐주세요. 민희 핸드폰에 유라와 통화한 기록이 혹시 있나요?”
영욱이 물었다.
“없어요. 유라의 번호는… 제가 지난달에 독일에 있는 유라와 통화할 때 번호를 저장해뒀는데 그 번호가 없습니다. 그리고 유라는 전화번호를 자주 바꾸고 대포폰을 사용해요. 또 이름도 여러 번 바꿨다고 들었습니다.”
“참 특이한 사람이군. 혹시 독일에서 결혼해서 아들 낳고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그 사람 주변에 진짜가 뭔지 한 번 알아봐. 진짜인 건 아무것도 없을걸. 이름도 가짜, 번호도 가짜. 아마 졸업장도 다 가짜일 걸. 진짜 수준은 중졸 정도 일지도 몰라. 아니 중졸도 안 될지도 모르지.”
김성현 영사는 따로 시켜온 맥주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영욱과 경태는 도움도 되지 않고 놀기만 하는 김성현 영사가 얄미웠다. 하지만 김영사가 한 이 말은 가슴 속 깊이 와 닿으며 마음속에 불같은 화를 불러일으켰다.
“대포폰을 사용하고 번호를 자주 바꿨다면 한 달 전에 전화를 한 이후에 번호를 또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가 최근에 있다면 거기로 전화를 걸어보면 어떻겠습니까?”
“아. 그거 좋은 생각이네. 역시 캠브리지에 다니는 수재는 다르구먼. 어서 확인해보게.”
김 영사가 말했다.
“네…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가 두 건 있네요. 일단 이걸로 걸어볼게요.”
첫 번째 번호로 건 전화는 통화 연결음이 갈 뿐 아무도 받지 않았다. 영욱과 김영사가 들을 수 있도록 조경태는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시도했다.
“전화를 안 받는데요. 그럼 다음 걸로 걸어볼게요. 오! 신호가 가요.”
셋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욱과 김성현 영사는 숨을 죽이고 스피커폰으로 들리는 통화연결음을 유심히 들었다.
“구텐탁”
“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그런데 누구시죠?”
조경태는 입 모양만으로 ‘유라가 맞아요’라고 말했다. 영욱과 김영사는 조용히 엄지를 치켜들었다.
“유라니? 경태오빠야. 민희 매니저.”
“어, 오빠 안녕하세요?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이건 민희 핸드폰인 거 같은데.”
“민희 핸드폰에 남은 번호로 전화한 거야. 너야말로 민희에게 왜 전화한 거야? 무슨 일이야? 너희 또 싸운 거야? 아니지 네가 일방적으로 민희를 괴롭힌 거지.”
경태는 순간적으로 민희에 대한 연민이 유라에 대한 원망으로 터져 나왔다.
"오빠, 갑자기 전화해서 이건 뭐에요? 앞뒤 설명 없이 이게 뭐냐고요?"
유라도 억울한 듯 말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민희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어요. 민희가 영국에 온다며 만나자고 했어요. 우린 사흘 전쯤 만났었고요.”
“그래서?”
“그래서라뇨?”
“민희가 그저께 죽었어. 너와 만나고 난 다음 날 말이야.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민희가 평소에 너와 잘 지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같은 그룹이면서 늘 너는 민희를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잖아.”
“…”
유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영사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5초 정도 지났을까? 유라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알겠어요. 제가 지금 민희를 죽였다고 의심을 받고 있군요. 저도 알아요. 제가 민희를 괴롭혔던 것. 저희 어머니께서 기획사에 찾아오셔서 하신 일 때문에 수사도 받고 있고요. 저도 저희가 죽을죄를 졌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한국에서의 행동 때문에 지금도 숨어서 지내고 있고요. 하지만 정말 아니에요. 전 민희와 이제 사이가 나쁘지 않아요. 민희를 도우려고 했다고요."
하지만 경태는 그것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워낙 말과 행동이 다른 것으로 유명했고 그 어머니를 보면 그 딸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런던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라는 게 혹시 민희를 없애겠다는 거 아니야? 너 한국에 있을 때부터 입버릇처럼 이야기했잖아. 가만두지 않겠다고. 나한테도 짤라버린다고 협박한 너야! 너 영국이야? 독일이야? 경찰에 신고해서 너 감옥에 잡아 가두고야 말겠어."
경태는 민희가 죽은 마당에 못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그간 쌓인 분노를 다 폭발시키는 듯했다. 하지만 영욱은 손바닥을 아래로 하고 손을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영욱은 메모지에 메모를 적어서 경태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증거가 필요해요. 만나자고 해요.'
영욱이 입 모양과 손짓 발짓으로 경태를 진정시키는 모습이 흡사 립싱크하는 힙합 가수 같았다.
“아, 안 되겠네요. 오빠. 죄송해요. 아직도 저를 믿지 못하시는 거죠? 만나서 이야기해요. 지금 어디세요? 만나서 다 보여드릴게요. 제가 왜 범인이 아닌지....”
영욱은 손가락으로 OK사인을 보냈다. 김영사는 이제 이들의 통화는 신경 쓰지 않고 마지막 감자 칩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래. 만나자. 그러면 언제 어디로 가면 되지?"
"어디신데요?"
"음...... 여기가 영국 국회의사당 주변이라네...."
경태는 뒷머리를 긁으며 영욱이 적어준 메모의 도움을 받아 유라에게 대답했다.
"그러면 하이드파크 돌고래 모양 분수대 앞에서 30분 뒤에 만나요. 저도 오후에 히드로에서 독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니 서둘러 만나는 게 좋겠어요."
조경태는 전화를 끊었다. 영욱과 경태는 맥주와 생선튀김을 다 먹고 가겠다는 김영사를 끌고 하이드파크를 향해 급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