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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슈테판의 도발 2 - 조선의 바다에서

세상의 주인 되기

by Jay Kang

영어권 국가들 중 몰타를 선택해 어학연수를 시작하고,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900여 명의 기숙사 학생 중 내가 속한 B동 6층에는 20여 명의 학생들이 10여 개의 방에 나눠 생활하고 있다.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던 이 공간과 사람들에게 이제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처음 룸메이트를 만났고, 랭귀지 스쿨에 등교한 후 기숙사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며 어색한 첫 만남을 가졌다. 지금 돌아보면 그 첫인상은 정말 생소하고도 긴장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완전히 다른 환경, 전혀 본 적 없는 외국인들과 오로지 영어로만 소통해야 하는 상황. 그 속에서 나는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외로움과 막막함에 휩싸였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지내면서, 비록 영어 대화는 서툴더라도 감정은 전해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언어보다 더 진한 감정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친구가 되어갔고, 시간이 지나며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나의 상황을 눈치챘는지 교사도 배려하며 수업을 진행해 주지만, 나는 하루빨리 상급반으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실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어려운 반에 가면 더 빨리 늘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결국 내게 가장 부족한 건 ‘듣기’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조금 더 인내하고 연습하면서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숙사 복도에서 슈테판을 마주쳤다.
루마니아에서 온 유학생인 슈테판은 평소에 유독 나에게 도발적인 말을 자주 던지곤 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야, 너 한국 사람이지? 그 제독 이름 뭐였지? 이... 뭐였더라?"

그가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순신 장군이었다.


나는 순간 놀랐다.
루마니아 청년이 이순신 장군을 안다는 사실도 신기했지만, 그가 이어서 던진 말이 더 인상 깊었다."그 사람이 한 번도 전투에서 진 적이 없던 사람 맞지? 근데 나중에 한국이 식민지 되었잖아. 그러면 그 많은 전투에서 이긴게 뭐 의미가 있었나?"


그의 말은 역사적 맥락을 생략한, 다소 도발적인 시선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설명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순간, 영어가 부족하다는 핑계로 피하고만 싶었던 내 태도를 떠올렸다. 이번만큼은 대화를 피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천천히, 최대한 쉬운 영어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순신은 1500년대 후반의 영웅이었어. 일본으로부터 한국을 지킨 건데, 그때는 단 12척의 배로 싸웠지. 식민지 시절과는 전혀 다른 시대였어. 식민지 시기가 오기 200년 전이었고."


슈테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말을 들었다.
내가 이어서 거북선과 명량해전을 설명하자, 그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와, 몰랐네. 나는 한국이 항상 중국이나 일본 아래에 있었던 줄 알았어."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한국은 오랜 시간 동안 독립적인 나라였어. 그리고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인물이야."

그의 눈이 반짝였다.

"오, 그거 멋지다. 존경해."


짧았지만 강렬한 대화였다.
그날 이후, 슈테판은 나를 볼 때마다 “General Lee!”라고 불렀고, 나도 그와 웃으며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날 나는 느꼈다.
영어는 단순히 문장을 주고받는 도구가 아니라, 내 정체성과 역사를 전하는 창구라는 것을.

그리고 조금 부족하더라도, 내 이야기를 전하려는 용기만 있으면 그 대화는 분명히 통한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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