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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오늘 하루, 두 개의 약속

세상의 주인 되기

by Jay Kang

오늘도 새 반에 배정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티쳐 Amira의 수업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버거웠다.
주말 내내 예습을 했음에도, 여전히 낯선 표현에 머뭇거리고, 티쳐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티쳐는 오늘 수업을 대화 중심으로 풀어갔다.
주제를 주고 팀별로 토론을 시킨 뒤, 발표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수업이 끝나기 직전, 각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즉흥적으로 소개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논리도 필요하고, 순간적인 순발력도 요구되는 자리였다.

반 아이들은 모두 20대 초반.
나는 그들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축에 속했다. 괜히 어른스러운 티를 내고 싶지 않아, "나도 하면 잘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조금 더 준비해 설명을 다듬었다.

어쩌다 보니 맨 마지막 차례가 되었다.
평소라면 티쳐가 나를 가장 먼저 지명했을 텐데, 오늘만은 이상하게 마지막에 기회를 주었다.

덕분에 준비할 시간이 조금 더 생겼다.
나는 중간에 작은 농담을 섞어가며,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상을 주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설명을 마친 뒤 나 자신에게 작은 만족감이 밀려왔다.
티쳐 Amira도 '잘했다'라고 칭찬해 주었다.

발표물


월요일, 한 주의 시작.
전에 같은 반이었던 나탈리가 전화를 걸어왔다.
곧 고국으로 돌아가는 친구의 송별 식사에 함께할 수 있냐고 물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갈게"라고 답하고, 서둘러 30여 분 거리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친구들과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오랜만에 애틋한 시간을 보냈다.

떠나는 친구에게 따뜻한 덕담을 건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오늘 저녁 7시의 약속이 떠올랐다.


기숙사에서 함께 지냈던 러시안 친구 엘라가 고국으로 돌아간다며 오래전부터 잡아두었던 저녁 모임.
하루에 두 개의 약속은 조금 벅찼다.
잠시 '가지 말까' 하는 유혹도 스쳤지만, 오랜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대학 기숙사로 향했다.


어린 엘라가 다른 플랫메이트들을 위해 직접 저녁을 준비했다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었다.
헝가리안 발린트에게 물으니, 간단히 와인과 맥주를 사자고 했다.
기숙사 입구에서 만난 발린트와 함께 술을 사고, 익숙한 6층 키친룸으로 향했다.

엘라는 여전히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초청된 친구들은 몇 명뿐이었다.

7시였던 약속 시간은 어느덧 9시가 다 되어가고,
기다림은 길었지만, 엘라가 부지런히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조용히 기다렸다.

콜롬비안 친구 요한도 초대됐지만, 늦은 밤까지 일을 해야 한다며 약속 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불참 소식을 전해왔다.
조금 더 일찍 알려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요한 없이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기는 여전히 어렵고 낯설었다.
심리적으로도 약간은 위축된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행히 발린트가 다가와 말을 걸어주고, 카드놀이를 제안해 주었다.
그 덕분에 조금씩 마음이 풀렸다.

밤 9시가 넘어, 우리 다섯 명이 하나둘 모였다.
나, 발린트, 엘라, 엘라의 몬테네그로 출신 친구, 그리고 이탈리안 엘리사베타.


우리는 소박하게 준비된 러시안 팬케이크를 나누어 먹었다.
차려진 음식이 팬케이크 하나뿐이라 조금은 허기졌지만,
두 시간 넘게 정성을 다해 준비한 엘라를 보며, 마음속으로 깊이 감사했다.

딸기잼과 연유를 발라 먹는 팬케이크는 달콤했고, 그 순간만큼은 배고픔도 잊혀졌다.

기숙사에 오랜만에 오니, 추억이 하나둘 떠올랐다.
몬테네그로에서 온 친구에게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물어보기도 하고,
엘라가 러시아로 돌아간 뒤의 계획, 엘리사베타의 근황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밤 10시를 앞두고, 나는 제안을 꺼냈다.
"우리 다 같이 해변에 가서 바다수영할까?"

모두가 환한 웃음으로 동의했고, 조만간 일정을 잡기로 했다.


아마 앞으로도 내 삶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발린트, 엘라, 엘리사베타는 곧 졸업하고, 또 어디론가 흩어질 것이다.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겠지만, 지금 이 순간, 같은 공간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참으로 소중했다.

이 마음을 친구들에게 전하니, 그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었다.
나는 그저 고마웠다.


불타는 젊음이라는 아름다운 재산을 지닌 이 친구들이
각자의 빛나는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기를, 조용히 응원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만남을 마무리하고,
밤하늘을 이불처럼 덮은 조용한 골목길을 혼자 걸었다.


어둠을 헤치며 걸어가는 이 길이, 어쩌면 내 인생길 같았다.
조용하고, 깊고, 누구와도 닮지 않은 나만의 길.

나는 그 길 위를, 천천히, 그러나 묵묵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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