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단어 이야기를 읽어라.
이번 주에는 브런치 글을 쓰지 말아야지 했다. 다음 주에 시작되는 개학도 준비해야 했고 다른 할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오후에 '생각의 차이가 일류를 만든다(이동규)'라는 책을 보다가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브런치를 쓴다.

"어렸을 적 교회에 나가보면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유명한 마태복음 5장 3절의 구절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의 것이요(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n the kingdom of heaven)." 어린 나로선 그럼 마음이 부유한 자는 복이 없다는 말인가? 가진 게 없어도 마음만은 부자여야 하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에 심한 혼란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나는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가난함(poor)이 비움(empty)의 뜻이란 걸 알게 되었다. (p200)"
poor라는 단어 뜻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우린 심한 혼란에 빠져야 했고, 오랜 시간이 걸려야지 이 단어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런 현실이 한국 영어교육의 민낯이 아닐까 하는 매우 씁쓸한 생각이 든다. 그리고 화가 나기도 한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한국인들의 DNA가 이런 식으로 고통을 받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빨리빨리'라는 한국인 특유의 철학(?)이 이런 고통을 자초했을지도 모른다. 우린 영어단어를 최대한 빨리 그리고 많이 외워야 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그 누구도 시원하게 주지 않았다. 그저 앞에 뛰는 쥐만 보고 달리는 나그네 쥐 레밍처럼 영어 공부에 열을 내었던 건 아닐까.
물론 영어단어 리스트와 이에 대응하는 한국말 뜻을 일대일로 외우는 방법이 필요할 때도 있다. 미국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필요한 GRE 시험을 볼 때는 이런 암기식 방법이 매우 유용하다. 하지만, 영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이런 영어 단어 공부법이 과연 효율적인지는 의문이 든다.
영어를 포기한 아이들에게 영어 공부에서 무엇이 가장 힘든지 물어보면 영어 단어 암기라고 한다. 하루에 20개, 100개, 200개를 다 외워야만 집에 보내주는 것은 공부라기보다는 아동학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외웠던 수만 수천 개의 영어 단어를 우린 정작 써먹지도 못한다. 그럼 영어 단어는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 것일까? 나에겐 정답이 없다. 더 나은 정답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할 뿐이다.

영어 단어는 총으로 쏴서 죽여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각 단어들은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특히 영어는 한 단어를 다양한 뜻으로 재활용하여 쓰는데 천재적인 언어이므로 각 단어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반드시 들어줘야 한다. 이에 반해 한국말은 각 단어가 고유한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영어 단어가 가진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고 무조건 암기 모드로 일관하면 절대 영어 단어와 친해질 수 없다.
그러면 우린 엄청난 시간을 낭비하게 되고 불필요한 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run이라는 영어단어를 오롯이 '달리다'라는 의미로만 외우면 a runny nose(콧물이 나는 코)를 달리는 코라고 해석하고, 구멍 뚫린 스파게티(pasta with a hole running through them)를 구멍이 달리는 스파게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 참, 영어 원어민들 사고방식 희한하네!'라고 생각한다. 영어 원어민의 사고방식이 희한한 게 아니라, 영어 단어 하나에 하나의 의미만 있다고 생각하며 한국어식으로 접근한 우리들의 사고방식이 희한한 것이다.
영어 단어가 가진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바로 이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내가 알고 싶은 단어를 검색창에 넣고 검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https://www.etymonline.com/ )
여기서 poor를 검색해보면 다양한 어원이 나온다. 이런 어원들을 대충 우리말로 해석해보면 "뭔가 부족하고 적은, ~이 전혀 없는; 빼앗김을 당한; 몸이 안 좋은 ; 부적절한, 약한, 마른"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the poor in spirit은 '마음이 허한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run을 검색해 보면 "흐르다, 뻗다"라는 의미가 나온다. run의 기본 의미와 이미지는 무언가가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콧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 쭉 흐르기 때문에 a runny nose라고 하는 것이고, 구멍이 막힘이 없이 계속 뚫려 있기 때문에 pasta with a hole running through them이 되는 것이다. run에 달리다는 의미가 있는 것도, 두 다리가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계속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The road runs along the valley. 이 문장을 읽을 때 한국인 들은 '엥! 길이 달린다고?'라고 의아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영어 원어민의 사고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면 이 문장은 길이 골짜기를 따라서 "쭉 뻗어 있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 단어는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몇 개만 알아도 정확히 알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각 단어가 가지고 있는 그들의 역사와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은 기억하기도 쉽고 사용하는 것도 쉽다. 평소에 내가 알고 있는 영어단어의 뜻으로 해석하는데 말이 안 되면 그 단어의 어원을 반드시 살펴보도록 하자.
며칠 전 새 학기 준비 워크숍에 강사로 오신 어떤 교장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담임 반 아이들을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접근하면 모두가 힘들어집니다. 아이들은 모두 각자의 역사를 가지고 교실에 들어옵니다. 왜 자꾸 지각을 하니라고 물어보지 말고 지각하는 행동 뒤에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영어 단어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무슨 뜻이 이렇게 많은 거야'라고 짜증내기에 앞서 그 단어가 지닌 역사를 먼저 알아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화내면 지는 것이다라는 말은 정말 진리인것 같다. 영어공부하다 화가 나면 내가 공부하는 방식이 잘못된 것임을 꼭 깨닫길 바란다. 내 머리가 결코 멍청해서 그런것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