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소설 ; 삼척이 기억하는 700년의 역사 (수정)
제왕지지(帝王之地), 이 땅에서 제왕이 나온다
웅장한 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바다를 향해 강이 용틀임하는 곳.
백두대간은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신령한 기운이 남으로 내달려, 옛적 단군이 하늘을 열었던 성지, 태백산에 이르러 거대한 매듭을 지었다.
백두대간의 삼수령에서 토해낸 물길은 셋으로 갈라져 삼면의 바다를 품었다. 한강이 서해로, 낙동강이 남해로 오십천은 동해를 향했다.
천하의 중심인 백두대간과 세 강의 발원지가 뿜어내는 정기(精氣) 중에서도, 가장 내밀한 왕기 서린 검푸른 기운만이 이곳에 응축되고 있었다.
백두대간의 정기가 하늘을 받치는 웅장한 산세와 산 아래로 굽이치는 오십천은 마치 용처럼 요동치며 땅을 적시며 흐르는 곳, 그 산세의 품에 안긴 마을은 생동하는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배산임수의 활기리는 천하가 숨겨둔 최고의 명당이었다.
산에서 내려온 붉은 기운은 흩어지지 않고 이 땅에 맺혔으니, 수백 년을 버틴 금강송들이 그 증거였다. 곧게 뻗은 붉은 소나무들은 마치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며 도열한 근위병의 기개와 닮아 있었다.
"보게나. 산은 멈춰 서서 왕을 지키고, 물은 흘러서 길을 트니 영락없는 제왕의 땅이 아닌가."
마을 촌로들은 활기천 너머 울창한 숲을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그곳은 단순한 숲이 아니었다. 하늘로 승천하려는 용이 잠시 머리를 쉬고 있는 명당, 그 정수리였다.
활기리는 백두대간의 정기가 응집되어 용맥이 꿈틀거리고, 땅속 깊은 곳에서 진응수가 솟아오르는 천하의 명당이었다. 죽어가는 고려라는 거목 옆에서, 새로운 왕조라는 묘목이 자랄 유일한 땅이었다
1266년 가을, 죽서루에서 이승휴의 시
고려 원종 7년, 이승휴는 진자후와 함께 죽서루에 올랐다. 오십천이 굽이쳐 흐르고 태백산맥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선 명승이었다.
난간에 기대어 오십천을 내려다보며 붓을 들었다.
"성긴 주렴을 걷으려 하니 영롱한 이슬에 젖어있고, 새 한 마리 날지 않으니 강물 빛은 수심에 잠겼네."
주렴의 이슬처럼 고려는 몽골의 간섭에 젖어들고, 새조차 날지 않는 고요함은 간언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조정을 닮았다.
"오십천을 보니 세월이 흐르는 것 같소. 왕조도 이 물처럼 흘러가지 않겠소?"
"조심하시오. 그런 말씀은..."
"역사를 보면 그렇지 않소? 중국의 수많은 왕조가 흥했다 망했소."
이승휴는 마지막 구절을 써 내려갔다.
"지금은 흰머리 노인이지만... 한가한 날 어울려 놀며 나와 이야기나 나누어 보겠는가."
"선생은 아직 젊지 않소. 무슨 흰머리 노인이란 말이오?"
"나는 이미 늙었소. 고려도 늙어가고 있소."
이승휴는 물었다. "천은사가 인근에 있다지요?"
"그렇소. 두타산 자락에 있는 작은 절이오. 언젠가 찾아가 보시오. 조용히 책을 쓰기에 좋은 곳이라 하오."
그는 알지 못했다. 14년 후 자신이 바로 이곳으로 유배되어 『제왕운기』를 쓸 것을, 그리고 활기천에서 한 호족과 만나 새로운 왕조의 씨앗을 심게 될 것을.
1274*년 가을, 활기리, 목조의 정착과 백우금관
이안사(목조, 4대조)는 숨을 고르며 산언덕을 올랐다. 170여 호를 이끌고 전주에서 동해안까지, 천리 길을 온 터였다. 중앙에서 파견된 별감과의 다툼이 빌미가 되었지만, 이안사는 알고 있었다. 고려는 이미 몽골의 그림자 아래 무너지고 있었다.
"이곳이 우리의 새 터전이 되겠소." 외가집(영경묘) 고향인 삼척으로 이주하였다
이안사는 결심했다. 도망자가 아니라 개척자로 살기로. 170여 호의 사람들은 활기천 주변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대궐터'라 불렀다. 아무도 대궐을 본 적 없는 마을에 붙은 이상한 이름이었다.
이양무(5대조) 아버지인 이린(6대조)은 무신정변의 주역인 이의방의 친동생으로 1174년 이의방이 정중부 일파에게 피살되면서 전주 이씨 가문은 멸문지화의 위기를 맞았다. 이 과정에서 이린 역시 화를 피해 전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이양무는 전주 이씨 후계자로 성장했고, 문신·무신 가문과의 혼인을 통해 전주 지역 군사·사대부 네트워크를 형성했으며, 그 기반 위에서 장군에 오르고, 전주 토호·무인으로 활동하였다. 아들 이안사가 전주로 전주를 떠날 때, 이양무도 함께 처가의 고향인 삼척으로 이주하였다”
이주한 지 1년 만에 아버지 이양무가 세상을 떠났다. 이안사는 묏자리를 구하려 백두대간을 헤맸다. 어느 날, 산길을 걷던 이안사 앞에 도승 한 명이 나타났다.
"이곳이오."
도승이 가리킨 곳은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터였다. 땅에서는 기운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곳에 소 백 마리를 제사지내고, 황금으로 관을 쓰면 5대에 제왕이 날 자리요."
이안사는 가슴이 뛰었다. 제왕! 전주에서 별감과 싸우던 그는 한낱 호족에 불과했다. 하지만 제왕이라니.
"소 백 마리와 황금관이라... 내게 그럴 형편이..."
도승은 씁쓸하게 웃으며 사라졌다. 이안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소 백 마리를 잡을 형편도, 황금으로 관을 쓸 재력도 없었다. 170여 호를 이끌고 도망 온 신세에 무슨 재물이 있겠는가.
며칠을 고민하던 이안사는 문득 외갓집에서 보았던 흰 소가 떠올랐다.
"그거다! 소 백 마리 대신 흰(白) 소(牛) 한 마리를 잡겠소. 한문 발음이 같지 않소? 백牛, 백牛!"
부인은 남편의 기지에 놀랐다. 이안사는 외갓집에서 흰 소를 빌려와 제사를 지냈다.
황금관은 어쩔 것인가. 그는 들판을 돌아다니다 금빛으로 익은 귀리 짚을 보았다. 황금처럼 빛나는 귀리 짚으로 관을 덮어 장사를 지냈다.
아버지 이양무의 묘 자리는 뒤로는 백두대간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앞으로는 지하수가 솟아올라 진응수를 이루었다. 산은 생기를 주고 물은 땅의 기운을 모아준다는 배산임수, 그 명당이었다.
이안사는 준경묘 앞에 서서 백두대간을 바라보며 진응수를 마시며 생각했다. '큰할아버지 이의방은 무신으로 왕을 조종하다 비참하게 죽으셨다. 하지만 나는 5대 후 우리 핏줄이 직접 왕이 되게 하리라.' 이때부터 그의 제왕 만들기의 꿈은 시작되었다.
1280*년 봄, 천은사 앞마당. 두사람의 만남
6년이 흘렀다. 이안사는 삼척에서 세력 기반을 다져가고 있었다. 아들 이행리는 장성했고, 따라온 사람들은 이제 200호로 늘어나 단단히 뭉쳐 있었다. 도승의 예언이 현실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악몽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전주에서 싸웠던 바로 그 별감이 삼척의 안렴사로 임명되어 온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조정에서 이름난 학자 이승휴가 파직당해 삼척으로 내려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4년 전 죽서루에서 시를 지었던 그 학자가 국왕의 실정과 조정의 부패를 간언하다 이곳으로 유배된 것이었다.
"천은사로 향한다 하오."
천은사는 활기천 상류, 준경묘에서 불과 몇 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안사는 말에 올랐다. 떠나기 전에 이 학자를 만나야 했다. 어쩌면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안사라고 하오. 전주에서 온 지 6년째 되었소."
"이승휴요. 들었소. 170여 호를 이끌고 왔다가 이제는 200호가 되었다지요?"
이승휴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 속에는 동병상련의 슬픔이 있었다. 이안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별감과의 다툼이 빌미였지만, 사실은 선생과 같은 이유였소. 고려는 이미 썩어가고 있소."
"조심하시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오."
"이곳은 한양이 아니오. 백두대간 너머, 동해를 바라보는 이곳은... 선생도 아시지 않소? 조정의 귀가 닿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이승휴는 잠시 침묵했다. 몽골의 간섭 아래 고려는 무기력했고, 권력은 부패했으며,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나는 역사를 쓰려 하오. 단군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를. 제왕의 운명을 기록하려 하오."
이안사의 눈이 빛났다.
"제왕이라... 선생, 사실 내게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소."
이안사는 도승의 예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소 백 마리, 황금관, 그리고 5대에 제왕이 날 것이라는 예언을. 흰 소와 귀리 짚의 백우금관 이야기까지.
이승휴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 묘가 어디에 있소?"
"여기서 멀지 않소. 준경묘라 하오."
"준경묘..."
이승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풍수에 밝은 그의 눈에도 그곳이 명당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선생, 나는 또 떠나야 하오. 그 별감이 안렴사로 온다 하오."
"떠나시면... 그 예언은?"
"그래서 선생을 찾아온 것이오. 왕조는 영원한가요? 고려는 얼마나 더 갈 것 같소?"
이승휴는 오십천을 내려다보았다. 죽서루 아래로 흐르는 물이 이곳 활기천으로 이어졌다. 14년 전 그가 시를 지었던 그 물줄기였다.
"이안사 어르신, 왕조는 영원하지 않소. 내가 쓰려는 『제왕운기』가 바로 그것을 증명할 것이오. 중국의 수많은 왕조가 흥했다 망했고, 우리 땅에서도 마찬가지였소."
"그렇다면..."
"고려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오. 그리고 새로운 왕조가 일어설 것이오. 덕으로 일어서고 부패로 무너지는 것이 왕조의 운명이오."
이안사는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떠나야겠소. 하지만 준경묘는 여기 남을 것이오. 내 아들과 손자들이 언젠가 돌아올 것이오. 5대 후에."
"어디로 가실 참이오?"
"북쪽이오. 동북면으로. 몽골과 고려가 싸우는 그곳에서 힘을 키우겠소. 고려가 끝나고 새 왕조가 일어선다면, 그 중심에는 힘이 있어야 하오."
이안사는 200호의 사람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동북면 의주를 향해. 떠나기 전날 밤, 그는 다시 한 번 천은사를 찾았다.
"선생이 제왕의 역사를 쓰시는 동안, 나는 제왕을 만들겠소. 우리 둘이 이 삼척에서 만난 것도 하늘의 뜻이 아니겠소?"
이승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사는 준경묘를 향해 절을 올렸다. 아버지의 묘 앞에서 맹세했다.
"5대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제왕의 혈통으로."
다음날 새벽, 이안사 일행은 삼척을 떠났다. 이승휴는 천은사 마당에 서서 그들이 북쪽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활기천이 흐르고, 백두대간이 병풍처럼 서 있었다.
1287년 여름, 천은사의 제왕운기
이안사가 떠난 지 6년이 흘렀다. 이승휴는 천은사에서 『제왕운기』를 완성했다. 단군에서 고려 충렬왕까지 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시로 기술한 역사 서사시였다. 몽골의 지배 아래서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정하고, 한반도 역사를 독자적으로 정립한 저작이었다. 제왕의 운명과 왕조의 흥망성쇠를 기록한 책이었다.
그 소식이 동북면에 있는 이안사에게도 전해졌다. 이안사는 이미 몽골에 투항하여 두만강변 오동지역의 천호장과 다루가치가 되어 있었다. 고려와 몽골 사이에서 저울질하다 내린 결정이었다.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그해 여름, 이안사의 증손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이 왔다. 이자춘. 이안사는 아이를 안아보지도 못한 채 멀리서 소식만 들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도승의 예언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5대에 제왕이라 했지. 나, 내 아들 이행리(익조), 손자 이춘(도조), 증손 이자춘(환조), 그리고..."
이안사는 삼척을 향해 절을 올렸다. 준경묘가 있는 곳을 향해.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완성하는 바로 그 순간, 새로운 제왕의 혈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용비어천가」직역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니,
꽃이 좋고 열매가 많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그치지 않으니,
냇물이 되어 바다에 이른다.
우리 동방의 임금은
예로부터 성대하였고,
그 기운가 옛적부터 내려오셨으니
왕업이 이와 같이 크게 일어났다.
[제1장]
해동의 여섯 용이 날아오르시어, 날마다 하늘의 복을 지으시니, 옛날에 왕업을 여셨으니, 하늘이 도움이 아니면 누가 있으랴.
어리석은 자가 감히 잊고자 하나니, 어디에서 그 이름이 나셨는가. 중원의 사기(선비의 기상)가 미치셔서, 나신 것이로다.
삼가 생각하여 말하건대, 아무리 견주어보아도 같을 이가 없고, 예로부터 힘을 붙들어 가지시니, 하늘이 도우심이 아니면 누가 있으랴.
[제10장)
선대가 닦은 마음과 올곧은 뜻이 자손에게도 전하여, 이어진 계통의 흐름이 하늘의 이치에서 비롯됨을 보여준다.
어려운 시기에도 바른 길을 버리지 않았던 이가 있어, 그 의로움이 끊어지지 않고 후대에까지 이어졌으니 이것 또한 하늘이 내린 복이다.
근심과 재앙 속에서도 굽히지 않은 마음이 있었기에, 피와 뿌리가 보전되고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으니, 이는 하늘의 보호가 아니면 어려운 일이다.
작은 싹이 자라고 큰 나무가 되어 그늘을 드리우듯, 선대의 흐름 위로 후대가 자라났으니, 이 또한 하늘이 마련한 뜻이다.
1394년, 준경묘을 찾은 이성계와 공양왕과 만남
이안사의 증손자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것이다. 이안사(목조), 이행리(익조), 이춘(도조), 이자춘(환조)을 거쳐 다섯 번째, 제왕이 탄생했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다음 해 삼척이 목조 이안사의 외가집 고향이면서 선대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 하여 부(府)로 승격시키고 지금도 박물관애 현존하는 홍서대(정1품 허리띠)를 하사하였다.
이성계는 왕이 된 후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삼척 준경묘였다. 고조할아버지 이안사가 흰 소를 잡고 귀리 짚으로 관을 덮어 장사 지낸 그곳. "이곳에서 시작되었구나."
진응수는 여전히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성계는 물을 떠 마셨다. 117년 전 도승의 예언, 고조할아버지의 집, 그리고 이승휴와의 만남. 모든 것이 맞물려 돌아간 결과였다.
"고조할아버지께서는 북쪽으로 떠나셨지만, 준경묘는 여기 남아 계셨습니다. 5대 후에 돌아온다는 약속을 저희가 지켰습니다."
진응수의 물을 마시며 태조는 생각했다. 공양왕은 이미 공양군으로 폐위되어 삼척으로 유배되었지만, 새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고려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는 더 확실한 조치가 필요했다.
태조는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인근 삼척 궁촌에 있는 공양군을 불렀다. 활기천이 흐르는 길가에서 두 사람은 마주했다. 폐위된 왕과 새로 즉위한 왕. 공양군은 무릎을 꿇었다.
"공양군, 일어나시오."
태조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공양군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감히 왕을 똑바로 볼 수 없는 처지였다.
"과인이 이곳 삼척에 온 이유를 아시오?"
"준경묘를 참배하러 오신 줄로 압니다."
"그렇소. 내 고조할아버지께서 5대 후 제왕을 꿈꾸신 곳이오. 그리고..."
태조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곳은 특별한 땅이오. 100년 전, 이승휴 선생이 천은사에서 『제왕운기』를 쓴 곳이오. 선생께서는 제왕의 운명을 기록하셨지. '덕으로 일어서고 부패로 무너지는 것이 왕조의 운명'이라고."
공양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조가 계속 말했다.
"이승휴 선생이 『제왕운기』를 완성하던 바로 그해, 내 증조할아버지 환조께서 태어나셨소. 제왕의 역사를 정리하는 순간, 새로운 제왕의 혈통이 시작된 것이오."
"..."
"삼척의 금강송이 참으로 울창합디다. 허나, 큰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면 새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법입니다."
공양군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인은... 전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태조는 공양군을 바라보았다. 왕조를 바꾸려면 완전한 단절이 필요했다. 왕씨 세력이 살아있는 한 조선의 기반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왕조가 바뀌는 것은 하늘의 뜻이오."
태조는 탁자 위에 술병 하나를 놓았다. 독주인지, 그저 위로주인지 알 수 없는 병이었다.
"부디, 마지막은 왕으로서 품위있게 가십시오. 이것이 내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예우입니다."
"예, 전하." 하면서, 순간 공양왕은 속으로 생각했다. "왕이 되고 싶지 않다 울며 매달리던 나를 억지로 용상에 앉힌 것도 당신였고, 이제 그 자리에서 내려왔음에도 죽으라 것도 당신이로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때는 지존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아비였다. 공양왕은 술잔에 비친 자식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태조의 비정한 권유에도 그는 들었던 잔을 힘없이 내려놓았다.
태조는 돌아섰다. 한양으로 가는 길, 그는 준경묘를 향해 다시 한 번 절을 올렸다.
1394년 4월, 삼척 고돌산에서 공양왕
그러나 공양왕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가느다란 희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우리 고려 태조(왕건)께서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을 죽이지 않으셨다. 오히려 장녀인 낙랑공주를 아내로 주어 사위로 삼고, 태자보다 높은 지위를 주어 극진히 예우하지 않았던가.'
그는 자신이 이성계에게 보였던 성의를 떠올렸다. 공양(恭讓)'뜻 그대로 옥쇄를 공손하게 사양했다
'즉위 교서를 내렸던 왕대비(공민왕비 안씨)께서 폐위 교서를 내리셨을 때, 나는 옥새를 내놓으며 저항하지 않았다. 이성계, 그자가 옥새를 받을 때 어떠했는가. 수창궁 대문을 걸어 잠그고 옥새를 들이미는 신하들을 피해 세 번이나 사양하는 시늉(三讓)을 했다. 그토록 명분과 덕을 가장하는 자가, 굳이 피를 묻혀 자신의 평판을 더럽히겠는가?'
무엇보다 그가 믿는 구석은 따로 있었다. 바로 끈끈한 핏줄의 연결고리였다.
'우리는 남이 아니다. 내 아우 정양군(왕우)의 딸이 이성계의 일곱째 아들, 무안대군(이방번)의 아내가 되었다. 내 조카딸이 그의 며느리인데, 사돈의 형을 죽이는 법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 아들 석(奭)이 또한 이성계의 아들과 처남 매부 지간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설마 죽이기야 하겠는가.'
태조가 떠난 지 한 달 후인 4월 17일, 공양왕 왕요와 그의 아들 왕석은 삼척 고돌산으로 불려갔다. 중추원부사 정남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역죄라는 명목이었다.
"반역이라... 내가 무슨 반역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공양왕은 쓸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정몽주가 교살당하고 2달만에 조선이 건국되었고, 다음달 공양군으로 강등되었다. 이것이 왕조 교체의 마지막 절차임을 직감했다.
공양왕은 간절한 눈빛으로 정남진을 바라보며 간청했다.
"내 목숨 하나로 고려의 흔적을 지울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리다. 그러나 내 아들은 왕씨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백성으로, 자네들이 모시는 주상의 사돈 친척으로라도 살게 해주게."
그러나 정남진의 표정은 차가웠다.
"전하, 이것은 사사로운 집안일이 아니라, 왕조가 바뀌는 대업입니다."
그날, 공양왕과 왕세자 왕석은 교살되었다. 이성계는 고려 태조 왕건이 아니었고, 조선은 신라를 품은 고려와 달랐다. 옥새를 세 번 사양한 것은 왕이 되기 위한 절차였을 뿐, 전 왕조를 살려두겠다는 약속은 아니었다. 사돈이라는 인연조차, 새로운 권력의 비정한 칼날 앞에서는 썩은 동아줄에 불과했다.
조선 건국은 정몽주의 죽음으로 구체화되고, 공양왕의 죽음으로 완성되었다. 정몽주의 피는 구시대를 닫는 제물이 되었고, 공양왕의 죽음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거름이 되었다.
삼척 땅은 그렇게 한 왕조의 무덤이자, 다른 왕조의 요람이 되어 역사의 아이러니를 품게 되었다.
고려 왕조의 마지막 왕과 그의 아들이 죽은 곳은,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쓴 천은사에서 멀지 않았고, 이안사가 5대 후 제왕을 꿈꾼 준경묘에서 멀지 않은 곳, 같은 삼척이었다. 이승휴와 이안사가 만나 왕조의 운명을 이야기하던 그 땅에서, 한 왕조는 완전히 끝났다.
그 후
공양왕릉은 훗날 경기도 고양에 조성되어 제사가 봉행되었다. 하지만 공양왕과 아들의 가묘는 여전히 삼척 궁촌에 슬쓸하게 남아 있다. 삼척의 무덤은 '실제 죽임을 당한 현장'이자 민초들이 몰래 흙을 덮어준 '진심의 무덤'이다. 준경묘와 가까운 거리에서, 한 왕조의 시작과 끝이 같은 삼척의 역사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다.
1580년, 정철 관동별곡의 물은 흘러서
1580년 봄, 강원도 관찰사 송강 정철은 죽서루에 올랐다. 314년 전 이승휴가 시를 지었던 그 자리에 서서, 그는 굽이쳐 흐르는 오십천을 바라보았다. 태백산맥에서 발원하여 산들을 휘감아 도는 물줄기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진쥬관(眞珠館) 듁셔루(竹西樓) 오십쳔(五十川) 나린 물이,
삼척 진주관 죽서루 아래 오십천의 흘러내린 물이
태백산(太白山) 그림재를 동해(東海)로 다마 가니,
그 물에 비친 태백산의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 가니
찰하리 한강(漢江)의 목멱(木覓)의 다히고져.
차라리 이를 한강 옆의 남산에 닿게 하고 싶다.
정철은 아름다운 풍경을 임금에게 바치고 싶은 충심이자, 변방에 나와 있는 신하의 연군지정이었다. 그는 오십천 물줄기가 한강으로 이어져 임금 계신 곳에 닿기를 바랐다.
하지만 정철은 알지 못했다. 그가 한양으로 보내고 싶어 했던 것은 단순히 물줄기와 풍경이었지만, 역사는 이미 더 큰 것을 한양으로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2008년 준경묘에서 숭례문으로
대한민국 국보 1호 숭례문이 화염에 휩싸였다. 숭례문을 다시 세우기 위해 가장 좋은 소나무가 필요했다.
복원팀의 눈길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삼척 준경묘였다. 준경묘 주변에는 수백 년을 자란 금강송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어명이다!"
준경묘의 금강송을 베기 전, 산림청 관계자들은 나무 앞에서 제를 올리고 '어명'을 외쳤다. 왕조 시대는 끝났지만, 왕의 무덤을 지키던 나무를 베는 일에는 그만한 예우가 필요했다. 준경묘를 묵묵히 지켜온 금강송들이 나라의 대문인 숭례문을 복원하기 위해 한양으로, 서울로 향했다. 이안사가 심은 왕업의 씨앗(금강송)이 734년이라는 장대한 세월을 넘어 마침내 왕도로 귀환한 것이다.
정철이 1580년 죽서루에서 그토록 바랐던 일이, 428년 만에 아이러니한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오십천 물줄기를 돌려 한강에 대고 싶어 했지만, 정작 한양으로 향한 것은 준경묘의 소나무였다.
결국 정철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물줄기는 아닌 백두대간의 땅기운을 머금은 소나무들이 한양으로 올라가 조선의 상징인 숭례문의 기둥이 되었다. 이승휴의 예언, 이안사의 꿈, 정철의 바람은 수백 년의 시차를 두고 이렇게 하나로 연결되었다.
삼척과 한양, 고려의 끝과 조선의 시작, 그리고 과거와 현재는 다시 한번 질긴 인연의 끈으로 묶이게 되었다.
역사는 오랫동안 이어 간다. 그리고 삼척에서 만남은, 사람의 인연은, 물줄기는, 역사를 만들었다.
역사적 사실: 이안사(목조)는 1250년대 전주를 떠나 삼척에 머물다 동북면으로 이주한 시기는 1254년 무렵입니다. 반면, 이승휴가 파직당해 삼척 두타산 아래 천은사에 은거하기 시작한 것은 1280년(충렬왕 6년)입니다. 소설속에 1281년(이승휴)은 1254년(이안사)으로 27년 시차입니다.
* 두 인물은 시공간적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소설 속의 만남은 시간을 초월한 영적 교감입니다.
* 두 왕의 만남은 극적 역사를 표현하기 위한 문학적 서사입니다.
준경묘는 조선왕조 태동의 발상지로서의 역사성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적 가치, 부인의 무덤인 영경묘와 더불어 남한지역에서 유일한 조선왕실 선대의 능묘로서 중요한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