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은 존중이다.
사연 1) 어느 날 낯선 전화 한 통이 왔다.
“친구! 나야. 오랜만이네”무턱대고 친구라고 하는 전화기 속 남자.
“죄송하지만 누구신지요”, ‘혹시 보이스 피싱?’.
그 남자는 들뜬 말투로 “00 초등학교 45기, 00 아니냐”, “중학교도 같이 나왔는데 동창을 몰라봐”
그 친구는 서운하다며, 연신 말을 이어갔고, 기억을 더듬어 가는 과정에서 누군지 알게 되었다.
같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왔지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 친구가 43년 만에 전화가 온 것이다. 반가움보다는 경계심이 앞선다.
“우리 조카가 자네 회사에 입사했어, 잘 좀 부탁하네”...
음, 기분이 묘하다.
사연 2) 지인이 급 하다며, 돈을 빌려달라는 이야기를 한다.
평소 돈거래를 하지 않는 나로서는 당황스러웠지만,
다음 달에 꼭 갚겠다는 말에 나는 마지못해 마음의 빗장을 조심히 열었다.
결국, 3년이 지난 지금도 미 상환 상태다.
사연 3) 평소 좋아했던 퇴직한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런 저런 안부 전화 이후에 이어지는 이야기.
“아우님, 자네 부서에 집안 조카가 있는데 승진해야 하나 봐”,
“이번에 근무평정 좀 잘 챙겨줘”
인간은 상호 협력을 통해 진화와 생존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하기에 수많은 상황 속에서 “NO”라고 단호하게 거절하기가 너무나도 어렵다.
살아가면서 겪는 가장 어려운 고통의 딜레마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자신이 여태까지 지켜온 윤리, 도덕, 가치, 철학...이 위협을 받고 있는 경고신호인 셈이다.
부탁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해결 하기 어려움 문제점을 들고 찾아 온다.
마치 자신은 풀수 없고, 타인도 풀기 어려운 수학문제를 들고 오는 격이다.
그래서 부탁을 받는 사람입장에서도 단호하게 거절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미안 합니다. ” 처럼 단호하게 거절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주도권을 잃고 끊임없이 응답하며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ok ” 라고 할 수도 없다.
더러는 불편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영혼 없는 응답 시스널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간과 해서는 않되는게 있다.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또 다른 오해를 불러 올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미온적인 판단이 겉으로는 원활한 소통을 통해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본래적 존재를 잃어버리게 된다.
자신을 속여 가면서 까지 타인에게 보여주는 가면(페르소나)에 집착하다 보면,
진정한 자신을 잃게 됨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잘못된 자기 절제가 단기적으로는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분노, 우울, 감정소진으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믿음에 대한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기도 한다.
더 나가 사회성 단절로 이어진다.
관계 단절, 감정 결핍, 대인기피, 불신...
사례처럼 “친구 미안해. 원칙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수 십 년 만에 연락 온 친구의 실망이 아른 거린다.
“어려운 입장은 아는데 내가 수중에 돈이 말라버렸네”
여유 돈이 있으면서 빌려주지 않는 죄책감.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게 아닐까?
숱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자신을 괴롭힌다.
거절은 배신이라는 감정이 지배적으로 또아리를 튼다.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고 거짓말하는 것,
나중에 약속을 지키지 못해 실망시키는 것,
그것이 진짜 배신이다. 거절은 용기이고 배려다.
사랑받고 싶은 욕구
심리학자 ‘에브러햄 매슬로’의 욕구 위계론에서 ‘소속과 사랑의 욕구’는 인간의 기본 욕구 중 하나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집단에 속하고 싶어 하고, 거부당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어릴 적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말 잘 듣고,
순종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 패턴이 계속된다.
무엇이든지 쿨하게 ‘예스 맨’ 하는 사람들에게 따라다니는 닉네임이 있다.
‘매사에 긍정적’, ‘협조적인 동료’...
우리 사회 전반은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 있고,
갈망, 이러한 환경들이 무의식에 각인되었다.
거절을 못하는 이유는 타인에게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력하기 때문이다.
거절=이기심=비협조.라는 등식이 만들어졌다.
갈등에 대한 두려움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벨’은 갈등을 ‘사회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았다.
하지만, 우리 문화는 갈등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그냥 넘어가자”,“좋은 게 좋은 거 아냐”,
“긁어서 부스럼 만들지 마” 같은 포용적, 양보, 이해... 이런 무수히 많은 변질된 말들에 꽤 익숙해 있다.
심리학에서 이런 걸 두고 ‘갈등 회피 성향’ 이라고 한다.
거절하면 상대가 화를 내거나, 서운해할까 봐 두려움을 같고 있다.
그래서 “네”라고 답하고, 속으로는 서운함과 분노를 삭인다.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거절을 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다.
자기 가치의 외부 존재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시선 속에서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며,
끊임없이 인정받으려 애쓰게 된다.
자존감이 낮거나, 자기 가치가 낮은 사람일수록 타인의 인정을 통해 자존감을 채우려 한다.
거절하면 ‘싫어할 까봐’, ‘나를 나쁜 사람으로 볼까 봐’ 두려움을 갖고 산다.
일종의 ‘착한 남자 증후군’이다.
완벽주의의 죄책감
우리는 때론 ‘모두를 만족시켜야 한다.’ 라거나
‘나는 항상 좋은 사람이야’라는 비 현실적인 기준을 스스로 부과하고,
거절하는 그 순간 그 완벽한 이미지가 깨질까 봐 두려워 한다.
그리고 거절 후에도 죄책감으로 괴로워 한다.
“내가 도와줄 수 있었는데...”,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나”같은 생각에 스스로 매몰된다.
사회적 결속을 유지하는 감정을 심리학에서는 죄책감이라 말한다.
하지만, 과도한 죄책감은 병리적이다. 오히려 관계의 질을 떨어 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