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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하는 습관을 갖자

대충사는 나와 이별하는 법

by 푸른 소금

“이별”

이 두 글자가 주는 먹먹함.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와 바닷가 몽돌들이 ‘촤르~’구르는 소리가 상처 난 가슴을

후벼 판다. 아픔이 되살아나고, 허무함이 가슴 깊이 스며든다.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 선명해지는 이별의 아픔.

마치 해 질 녘 가을 골목길을 혼자 걷는 것처럼, 낭만이 아닌 공허하고, 쓸쓸한 감정들이 휑하고 골목바람을

타고 지나간다.


우리는 왜, 아픈 줄 알면서도 다시 사랑할까?

이별을 이토록 아파했으면서도 우리는 또 누군가를 만난다. ‘다시 사랑하지 않겠다’고 ‘이제 혼자 살겠다’고 눈물 흘리며 다짐했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 또 누군가에게 가슴 설레고 있다. 인간은 지극히 망각의 동물이다. 그래서 과거의 이별의 고통을 잊고 달콤함의 기억 속에서 또 사랑에 빠진다.

그렇게 이별의 아픔과 만남 셀렘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성장해 나간다. 이별은 아픈것만 있는게 아니다.

기쁨과 행복의 이별도 있다.

바로 내 자신의 마음속에 숨 쉬고 있는 나쁜 감정들과의 이별 이다.

이런 감정들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을 때, 과거에 매몰되어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또, 인간관계가 무너질 뿐만 아니라, 인생에 후회만 남게 된다. 이런 낡은 생각과, 나를 끌어내리는 태도들과 이젠 영원히 이별해야 한다.



1. 게으름이라는 달콤한 독

“내일 하면 되지 뭐”게으름은 참 달콤하다. 소파에 누워 TV나 유튜브를 보는 순간. 복잡한 일을 내일로 미루는 그 순간 얼마나 평안한가. 하지만, 그렇게 미룬 내일들이 낙엽처럼 쌓여 어느새 1주일이. 1달이. 1년이

훌쩍 지나간다. 그리고 세월이 가는 것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 대해 아쉬워한다. 아무것도 못한 채

그렇게, 나의 시간은 마치 타인의 것처럼 지나간다.

게으름은 다양한 얼굴로 온다. 때론 친구처럼, 때론 마시멜로처럼... 천 가지 얼굴로 유혹한다. 게으름은 단순히 무엇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음에도 안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 이면에는 자존감 부족이나 자신감 결여, 동기부여 감소 등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게으름은 단순히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잠재력을 배신하는 행위다. 할 수 있는 사람이 하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2. 불평이라는 늪

“그러니까 상사가, 친구가, 부모가... 문제야”불평은 참 쉽다. 네 탓, 세상 탓, 환경 탓, 계절 탓... 먼지보다 많은 “탓”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 쉽다. 어떤 이는 피해자 코스프레로 자신은 늘 피해자라는 입장을 내세운다.

비겁하고 졸렬한 행동으로, 대게 불평이 많은 사람들을 살펴보면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사람들, 흔히 이중적인 사람들이 많다. 철학자들은 불평은 ‘스스로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고백’으로 해석했다. 노력은 하지 않고 불평만 터트리면서 자신의 책임을 ‘셀프면제’시키고 있다.


3. 비난이라는 독한 무기

“꼴좋다. 잘됐네”타인을 비난하는 순간, 우리는 잠깐 우월감을 느낀다.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는 착각을 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비난은 부메랑이 된다는 사실이다. 내면의 두려움이나 열등감이 비난이라는 괴물을 만들어 낸다. 손가락으로 타인을 가리켰을 때 3개의 손가락은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비난은 자신을 한 뼘도 성장시키지 못한다. 연구에 따르면 열등감이 많은

사람일수록 타인을 더 자주 비난한다고 한다. 결국 비난은 자기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기 싫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4. 변명, 성장을 막는 투명한 벽

“바빠서 못 했어”변명은 나를 지키는 방패처럼 또는 벽처럼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변명은 교묘하다. 매우 그럴싸하고 합리적인 것처럼 둔갑을 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자기기만’, ‘자기 정당화의 매커니즘’이다. 변명을 하는 순간 자유를 포기하고, 책임을 덜어 버리는 것이 된다. 그리고 자신은 현재에 갇히게 된다.


5. 편견, 타인을 증오하는 폭력

“요즘 애들은 싸가지가 없어”우리는 타인을 너무 쉽게 재단을 한다. 나이, 지역, 학벌... 사람을 판단할 때는

객관적 입장에서 기준을 두어야 하는데 틀에 가둔다. 그러다 보니 색안경을 낀 채로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편견이라는 습관은 가장 폭력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타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다르다 ’와 ‘틀리다 ’를 혼동하는 것이 편견의 핵심이다. 인식론적으로 본다면 편견은 확증편향의 극단적 형태다. 자신에게 믿음을 주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차단한다. “저 사람은 원래 그래”라고 단정 짓는 순간, 그 사람의 다른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된다.


현명하게 이별을 못하는 이유

게으름, 불평, 비난, 변명, 편견 이 다섯 가지 나쁜 습관은 뿌리가 같다.

첫째는, 자기중심적이다. 세상을 오직 자기 관점에서 본다. 내가 장답이 거 내가 기준이기 때문에 타인의 관점과 다른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둘째는, 두려움이다. 비난은 마음속 내 문제를 마주하기 두려워서, 불평은 변화가 두려워서, 변명은 책임이 무서워서. 게으름은 실패가 두려워서, 편견은 다름을 이해하기 어려워서. 결국 우리의 나쁜 습관들은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오늘 이별해야 할 것

고대 그리스 델포이 신전에는 이런 굴귀가 새겨져 있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했다.

첫 번째는 자기 성찰이다. 내 안의 비난, 불평, 변명, 게으름, 편견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타인에 대한 이해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이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타인도 나만큼 복잡하고 나 만큼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세 번째는 실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Virtue)은 반복적인 실천을 통해 습관이 된다고 했다. 비난 대신 이해를, 불평 대신 행동을, 변명대신 책임을, 게으름 대신 노력을, 편견 대신 열린 마음을 선택하는 것, 한번 두 번 반복을 하다 보면 그것이 습관이 된다.

성찰과 이해와 실천을 통해 우리는 조금 더 인간 다워 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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