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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야 Aug 04. 2022

함박눈이 내린 새벽(3)

단편소설 / 

김 할머니 여러 개의 통장이 들어있는 베개를 만져보았다. 베갯속에 통장을 넣어둔 것은 아무도 모른다. 자식이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이는 무서운 세상이 아닌가. 며칠 전 유학생이 용돈을 안 준다며 부모를 살해하였다는 뉴스를 생각하고 몸서리를 쳤다. 김 할머니는 베개를 꼭 끌어안았다.

방바닥이 따뜻해졌다. 가슴에 꼭 안고 있던 베개를 요 위에 내려놓은 뒤 밖으로 나섰다. 바람은 사윌 줄 모르고 더욱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부엌으로 들어가 두꺼비집을 열어보니 검푸른 불꽃이 널름거린다. 김 할머니는 널름거리는 불꽃을 피해 행주로 연탄집게를 감싸고 연탄을 갈았다. 어제 새로 연탄을 들일 때, 처음 본 배달부가 바쁘다며 새 연탄을 앞에 쌓아놓고 가버렸다. 평소에 오던 배달 아저씨 같으면 마른 연탄을 앞쪽으로 꺼내놓고 아직 마르지 않은 새 연탄을 뒤쪽으로 쌓아두었을 텐데, 뒤쪽에 있는 마른 연탄을 꺼낼 수가 없다. 김 할머니는 아직 마르지 않은 연탄을 사용하는 것이 꺼림칙했지만 밑불이 너무 좋아 별일 없겠지라는 생각으로 축축한 새 연탄을 집어 화덕에 넣었다. 그리고 두꺼비집을 덮고 불구멍을 열어놓은 다음 부엌문을 닫았다.


어느새 별은 자취를 감추고 싸늘한 바람과 함께 한 송이 한 송이 눈이 날리고 있었다. 김 할머니가 털신을 벗고 마루로 올라서는데, 안방 문이 열리며 안집 박 할머니가 마루로 나왔다.


“왜요? 할머니네 집도 탄불 꺼졌어요?”


김 할머니의 물음에 박 할머니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당최 답답하고 속에 열불이 나서 잠이 와야지요. 근데 아직도 연탄불이 안 붙었어요?”


“이제야 피었어요. 잠 안 오면 들어와요. 나도 잠이 안 오는데 같이 이야기나 하다 자게요.”


박 할머니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김 할머니를 따라 김 할머니 방으로 들어섰다.


“웬 눈이 올까요?”


“날이 하도 가물어서 눈 오면 좋지요. 뭐.”

두 노인은 나란히 요 위에 앉았다. 삼라만상이 숨을 죽인 듯 고요했으며, 눈 내리는 소리만 사그락사그락 들릴 뿐이다.


“할머니 나 같으면 자식이 무슨 필요가 있어요. 뼈 빠지게 공부시켜 놓은 놈들은 저 잘나서 잘된 줄 알고, 어미 꼴도 안 보려 하고, 막내 놈은 누가 절 보고 공부하지 말랬나, 형편이 어려웠어도 지가 공부하겠다고 우겼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보냈겠지요. 그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인제 와서는 왜 저만 대학에 안 보냈냐고 원망이나 하고, 마흔이 넘도록 장가를 못 간 것이 내 탓인 양 퍼부어대니……. 진작 쟤들 아버지 따라 죽었으면 이 꼴 저 꼴 안 보는 건데.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지만 제발이지 오늘 저녁에라도 좋으니 자는 듯 죽었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박 할머니는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쳤다.


“글쎄, 요즘 젊은 얘들은 어찌 그리 똑 부러진 지. 며느리 될 여자가 아파트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결혼은 할 수 없다고 했다나 봐요. 그렇다고 내가 가진 게 있어야 아파트를 얻어주든지 말든지 할 텐데, 그렇지도 못하고. 즈 형 놈도 그래요. 저는 그래도 강남에 35평짜리 아파트를 가지고 있으니 이 집이라도 팔아 작은 아파트 한 채라도 얻어주면 좋은데 말도 못 꺼내게 하니, 경석이 저 녀석도 오죽 속이 타겠어요. 그러니 애꿎은 나한테 역정만 내고…….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꼴을 당하고 사는지, 속상해서 정말 못 살겠어요.”


“그런데 경석이는 그렇게도 모아둔 돈이 없어요?”


“배운 게 적어서 월급이 얼마 안 되잖아요. 그거로 생활비 쓰고 남는 거 적금을 들었나 본데, 지난번 나 팔 부러져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원비 대느라 그것마저 해약했다고 그러더라고요. 저도 화도 나겠지요. 생각하면 불쌍해 죽겠어요.”


“듣고 보니 그렇겠네요.”


박 할머니는 한 달 전 노인정에 가다가 넘어져서 왼팔이 부러졌었다. 3남 3녀나 되는 박 할머니의 자녀들은 큰일이나 난 듯 달려와 법석을 떨었지만, 큰며느리와 시누이들의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팽하니 가버렸다. 결국, 박 할머니의 병원비며 간호는 경석이 혼자 고스란히 감당해야만 했다.


“그래 남의 집 큰며느리로 들어왔으면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어머니를 왜 이렇게 내버려 두는 건데?”


큰 시누이가 노기등등한 소리로 말했다.


“아니, 형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 정말 서운해요. 제가 어머님 모시기 싫어서 지금 안 모시는 게 아니잖아요? 그동안은 우리가 살던 집이 손바닥만 해서 어머님을 모실 수 없었고, 지금 이사한 분당 집이 35평이라 넓은 줄 알지만 그렇지 않아요. 우리 식구 넷에 방이 3개뿐인데 어머님을 어디에 모셔요. 그리고 몇 달 있으면 큰애 대학 입시잖아요.”


“뭐, 대학시험? 왜 어머니가 있으면 그 애 공부 못하게 할까 봐? 그 말 같지 않은 소리 작작 하라고!”


“그리고, 형님, 작은 동서네는 우리보다 아파트도 넓고 애들도 어린데 거기 보고 어머님 모시라 하면 될 텐데, 왜 우리 보고만 모시라고 해요. 큰아들로 태어난 것이 무슨 죄에요?”


“아니 형님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우리 집이야말로 지금 얼마나 바쁜지 몰라서 그러시는 거예요?. 아파트 입주할 때 융자받은 거 아직도 갚지 못해 오죽하면 방 한 칸이라도 세를 놓을까 궁리 중인데.”


이렇게 탁구공처럼 입씨름이 오가자 방구석에 말없이 앉아있던 경석이가 큰소리로 외쳤다.


“이런 씨팔! 형수고 누나고 나발이고 다 꺼져버려. 모두 죽여버리기 전에 그래 너네끼리 잘살아라. 내가 어머니 모시고 살 테니까!”


화를 참지 못한 경석은 부엌으로 한걸음에 달려가 부엌칼을 들고 나왔다.


“아이고, 이놈아 너 미쳤냐? 형수와 누나들한테 그 무슨 말버릇이냐? 니들 내 앞에서 이럴 거면 내가 약이라도 먹고 죽으련다. 제발 그만 들 두거라.”


두 며느리는 평소 순하디 순한 막내 시동생이 칼을 들고 욕설을 하자 깜짝 놀라 꼬리를 감추고 달아나버렸다. 세 딸도 멋쩍었던지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날 밤 경석이는 방바닥을 치며 통곡을 했다. 김 할머니는 방 안에서 숨도 쉬지 않고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부모를 서로 안 모시려 핑계를 대는 며느리들이나 딸 노릇도 제대로 안 하면서 시누이 노릇만 하려는 딸들의 행동이 미워 마치 자기 일인 양 주먹을 불끈 쥐고 바르르 떨었었다.


그때의 울분을 생각하고 김 할머니는 박 할머니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리로 누워요. 날이 곧 밝을 테니 그냥 여기서 잠깐 눈이라도 붙여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어요. 건너가서 내 베개 가지고 올게요.”


미닫이 방문을 여니 찬바람이 휑하니 방안을 휩쌌다. 두 할머니가 나란히 이불을 덮고 누웠을 때 벌써 4시가 다 되어있었다.


“할머니, 자요? 차라리 나도 이 눈치 저 눈치 안 보고 할머니 따라 박스라도 주웠으면 다만 얼마라도 벌었을 텐데, 그러면 지금 이렇게 답답했겠어요?”


박 할머니는 연신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김 할머니는 조용히 밀려오는 잠을 떨치며 생각했다. 어찌 보면 태성이 그 아이가 가슴에 못을 박아 팔십 평생 죄인으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아왔지만, 효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경석이만 봐도 그렇게 제 어머니한테 살갑게 하더니 결혼을 앞두고 벌써부터 제 어머니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하다니…….


금쪽같은 내 돈, 경석이 아파트 얻는 데 도와줄까? 어차피 나야 언제 죽을는지도 모르고 태희 그년은 잘 사니깐, 아니 못 산다고 해도 단 한 푼도 주고 싶지 않다. 장가갈 때가 되었지만, 장가도 못 가고 죽은 아들 태성이 때문에 누가 결혼을 한다고 하면 남몰래 울기도 많이 했었다. 경석이 녀석 배운 게 없어 거칠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름이면 등목도 해주고 먹을 것을 사 오면 제 어머니와 똑같이 나누어 준 인정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박 할머니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온다. 김 할머니는 고개를 돌려 박 할머니의 오른팔을 이불속으로 넣어주었다. 그리고 다독다독 이불깃을 여며주었다. 김 할머니는 일어서서 형광등 스위치를 내렸다. 하나둘 내리던 눈은 새벽을 맞으며 함박눈이 되어 대지를 덮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경석이 일어나 건넌방 문을 열어보고 소스라쳤다. 방안은 온통 연탄가스로 가득 차 있었고, 두 할머니는 사이좋게 한 이불을 덮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깊이깊이 잠이 들어있었다. (1995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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