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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 (Bellis perennis) 이야기

가야의 꽃이야기

by 가야

데이지의 조용한 속삭임


신화와 문학 속에 피어난 꽃


“데이지”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크고 하얀 꽃잎을 가진 샤스타데이지나 마가렛을 떠올립니다.


정원 화단에 곧게 피어나는 큼직한 꽃,
꽃다발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런 모습 말이에요.


하지만 알고 보면,
그건 우리가 만들어낸 데이지의 이미지일지도 모릅니다.

리빙스턴데이지

샤스타데이지, 리빙스턴데이지 등 앞에 무슨무슨 이름이 붙지 않은 데이지는 어떤 식물일까요?


데이지의 영어 이름은 ‘벨리스 페레니스(Bellis perennis)’, 데이지가 어떤 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이름도 사랑스러운 ‘벨리스 페레니스(Bellis perennis)’는 유럽이 원산인 국화과 식물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데이지’라는 이름의 대표 종입니다. 이 꽃은 ‘잉글리시 데이지’, ‘잔디 데이지’, 또는 ‘일반 데이지’라 불리며, 다른 데이지 종류와 구분되곤 하지요.


작고 숟가락 모양의 잎들이 바닥에 둥글게 펼쳐진 모습은 마치 풀잎 사이에서 수줍게 미소 짓는 듯합니다. 키는 약 20cm 안팎, 작지만 강인한 여러해살이 식물로, 짧은 땅속줄기를 따라 번지며 잔디밭 곳곳에 뿌리를 내립니다. 특히 잘 관리된 잔디밭에서도 쉽게 박멸되지 않아 ‘론 데이지(lawn daisy)’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꽃은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3월에서 9월 사이에 피며, 해를 따라 방향을 바꾸는 ‘헬리오트로피즘(heliotropism)’ 현상을 보입니다. 한 송이 꽃은 사실 수많은 작은 꽃이 모인 ‘복합화서’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심의 노란 원반꽃과 가장자리의 흰색 또는 붉은 기가 도는 설상화가 어우러져 햇살처럼 환한 얼굴을 하고 있지요.

라틴어 이름 속에는 이 꽃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이 담겨 있습니다. Bellis는 ‘아름답다’는 뜻의 bellus, perennis는 ‘영원한’을 의미하지요.


낮에는 활짝 피고, 밤이면 고개를 숙이는 이 꽃의 특성에서 유래해, 영어 이름 daisy는 ‘day’s eye(낮의 눈)’의 변형으로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중세의 제프리 초서는 데이지를 ‘오늘의 눈’이라 불렀고, 한때는 ‘메리 로즈(Mary Rose)’로도 불리며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도록 머물렀습니다.


한편 데이지는 상처를 치유하는 약초로도 사용되며, ‘브루이즈워트(Bruisewort)’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때로는 ‘뼈꽃(bone flower)’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그 단단한 생명력과 함께 몸과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식물로 여겨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른 여름부터 한여름까지 꽃을 피우는 벨리스 페레니스는, 환경이 잘 맞으면 개화 시기가 길어져 늦가을은 물론, 온화한 겨울에도 간간이 꽃을 피우곤 합니다.


햇볕이 잘 드는 장소는 물론 반그늘에서도 잘 자라며, 영하 35도에서도 견딜 만큼 강한 생명력을 지녔지요. 병충해나 특별한 관리도 거의 필요하지 않으며, 배수가 잘 되는 토양이라면 어디서든 기분 좋게 자랍니다.


정원의 한 모퉁이나 잔디밭의 가장자리, 혹은 영국식 오두막 정원처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공간에서, 데이지는 귀중한 땅 덮개 식물로 사랑받습니다. 특히 이 식물이 자리 잡고 나면, 잡초의 성장을 막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품종에 따라 꽃 색은 흰색, 분홍색, 붉은빛을 띠며, 크기나 형태도 납작한 꽃부터 둥근 구형 꽃까지 다양하지요. 단일꽃과 겹꽃으로 나뉘며, 봄철 묘목으로 판매되기도 하고, 씨앗이나 분주로 번식하기도 합니다. 대부분 자가수정이 가능하지만, 일부 개체는 자가불임일 수도 있어요.


이 데이지는 단지 보기 좋은 꽃에 그치지 않습니다. 잎과 꽃은 식용이 가능하며, 어린잎은 샐러드나 나물로, 꽃잎은 샌드위치나 수프에 곁들이면 아삭하고 상큼한 맛을 더해줍니다.


꽃차로도 우려 마실 수 있고, 때로는 비타민 보충제로도 활용되지요. 민간에서는 약용으로도 쓰였는데, 벨리스 페레니스는 약간의 떫은맛과 함께 해열이나 염증 완화에 쓰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꽃은 순수한 놀이의 추억도 담고 있습니다. 유럽의 아이들은 데이지로 목걸이나 팔찌를 엮어 ‘데이지 체인’을 만들며 놀았고, 그 모습은 지금도 오래된 동화책 속에서 생생히 살아 있지요.


그 사랑스러움 덕분에 ‘데이지’는 여성 이름으로도 사용되며, 프랑스어식 이름인 *마거리트(Marguerite)*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이름과 별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편 데이지는 이탈리아의 국화로 잘 알려져 있으며, 고전과 신화의 나라답게 이 작고도 사랑스러운 꽃에 순수함과 희망의 상징을 담았습니다.


네덜란드에서도 ‘마르그리트(Marguerite)’라는 이름으로 널리 사랑받아 왔으며, 왕실의 마르그리트 공주와 연결되면서 문화적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지요. 하지만 공식 국화는 튤립으로, 세계적으로도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꽃으로 인식됩니다.

♣ 데이지에 담긴 이야기들


데이지, 그 작고 소박한 꽃에는 생각보다 깊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신화 속 전설부터 셰익스피어의 비극, 중세 시인의 시어까지—이 작은 꽃은 시대와 문화를 넘나들며 다양한 상징을 품어왔지요.


1. 로마 신화 – 요정 벨리데스

데이지의 학명 Bellis perennis는 로마 신화 속 숲의 요정 **벨리데스(Belides)**에서 유래합니다.


어느 봄날, 벨리데스는 정원의 신 **베르투무누스(Vertumnus)**의 구애를 받습니다. 하지만 점점 집착으로 변한 그 사랑이 두려워진 요정은 신들에게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를, 꽃으로 바꿔 주세요…”


요정의 기도는 곧 이루어지고, 그녀는 작고 하얀 꽃으로 변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데이지입니다.


순수함과 겸손,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선택—
데이지는 그런 이야기로 태어난 꽃입니다.


2. 셰익스피어의 『햄릿』 – 오필리어의 데이지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사랑과 슬픔 속에 미쳐버린 오필리어는 꽃들을 나눠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There’s rosemary, that’s for remembrance;
and there is pansies, that’s for thoughts...
and there’s a daisy.”


(로즈메리는 기억을 위한 것이고,

팬지는 생각을 위한 것이며…
그리고 여기 데이지가 있어요.)


로즈메리는 기억, 팬지는 생각을 상징하지요. 그리고 데이지도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지만—
그녀는 그 데이지를 자신에게는 건네지 않습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순수함조차 외면당한 채, 오필리어는 침묵 속에서 자신을 지워버립니다.
그 장면에서 데이지는 깨진 사랑, 말하지 못한 순수함의 상징이 됩니다.


✒️ 3. 중세 시인 초서 – 꽃의 여왕


중세 영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는 데이지를 “The Empress of the Flowers”, 모든 꽃들의 여왕이라 노래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태양을 따라 고개를 드는 데이지의 소박한 움직임 속에서 진실한 사랑을 보았습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진실한 것, 수줍지만 끈질긴 것—

그것이 바로 초서가 노래한 데이지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많은 꽃들이 전설을 갖고 태어나지만 데이지는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피어납니다.


요정의 마지막 기도 속에서, 셰익스피어의 침묵 속에서, 중세 시인의 찬미 속에서, 데이지는 언제나 순수와 희망의 꽃으로 존재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 데이지는 그런 꽃입니다.

♣ 이탈리아의 데이지 – 국화로서의 상징


이 작고 수수한 데이지(Bellis perennis)가 이탈리아의 국화라는 점입니다. 샤스타데이지가 미국에서 개량된 원예종이고, 마가렛은 지중해성 기후에서 자라는 분화 식물인 데 반해, 잉글리시 데이지는 유럽 전역에서 자생하는 들꽃으로 특히 이탈리아와 영국의 전통과 감성 속에 깊이 스며든 꽃입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데이지를 "마르게리타(Margherita)"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꽃의 이름을 넘어서, 여성의 이름으로도 자주 쓰이며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소녀'의 대명사로 여겨지곤 합니다.

이탈리아인들에게 데이지란?


어린 시절 들판에서 뛰놀던 기억

첫사랑에게 몰래 건넸던 작고 흰 꽃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하며 꽃잎을 떼던 사랑의 점괘 놀이(floral oracle)의 주인공입니다.

소박하지만 정직한 이 꽃은 이탈리아인들의 감성 속에서 ‘진심을 말해주는 꽃으로 여겨집니다.

♣ 데이지의 꽃말과 상징


이탈리아에서 데이지가 지닌 의미는 영국의 꽃말과도 연결되지만,
더 따뜻하고 인간적인 감성을 담고 있습니다.

순수(Purezza)

충실함(Fedeltà)

새로운 시작(Nuovo inizio)

사랑스러운 고백(Confessione d’amore)


이 꽃은 화려하지 않지만, 항상 그 자리에 다시 피고, 끝까지 햇살을 따라가는 성실한 존재입니다.

이탈리아가 국화로 데이지를 선택한 것은 아마도 이 나라 사람들이 자연의 진심과 조용한 강인함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데이지

<위 영상 꽃은 샤스타데이지>


많은 꽃들이 전설을 갖고 태어나지만
데이지는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피어납니다.


요정의 마지막 기도 속에서,
셰익스피어의 침묵 속에서,
중세 시인의 찬미 속에서,
그리고 지금, 이탈리아 들판과 마음속에서,
데이지는 언제나 순수와 희망의 꽃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
데이지는 그런 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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