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
가을이 되었다.
꽃은 점점 작아지고, 꽃잎은 마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부터가 또 하나의 시작이라는 걸,
나는 언니에게서 배웠다.
바삭하게 마른 꽃송이 속에는
작고 까만 씨앗들이 숨어 있었다.
겨우 콩알만 한 것들이지만,
그 안에는 한 계절이 담겨 있었다.
햇빛도, 바람도, 기다림도.
그리고 언니와의 시간도.
나는 씨앗을 조심스레 모아 작은 유리병에 담았다.
라벨을 붙이고, 날짜를 적었다.
‘천일홍 – 113호 언니 씨앗, 2025년 가을’
며칠 뒤, 평소 화단 앞에서 늘 말을 건네던 이웃 아주머니가 말했다.
“올해는 천일홍이 유난히 예쁘네요.”
나는 웃으며 씨앗 한 줌을 봉투에 담아 건넸다.
“언니 씨앗이에요. 홍은동 살던 시절부터 이어진 거예요.”
그분은 씨앗을 받아 들고 잠시 말이 없었다.
작은 봉투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의 무게를 느낀 듯했다.
그날 이후,
몇 사람에게 씨앗을 더 나누었다.
아파트 밴드에, 블로그 독자에게,
작은 손편지와 함께 ‘천일홍 씨앗’을 넣었다.
그건 씨앗이 아니라,
기억을 나누는 일이었다.
어느 해, 누군가는 내게 씨앗을 심었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베란다 난간 위 작고 수줍은 꽃.
“이 꽃이 언니의 천일홍인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요. 그 마음까지 닮았네요.”
꽃은 피어날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작은 화분에서도, 햇살 모자란 창가에서도,
천일 동안 붉은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올해도 씨앗을 나누었다.
내년에도 그럴 것이다.
혹시 이 꽃을 처음 키워보는 누군가가
이 씨앗을 받아 작은 생명을 피워낸다면,
그건 단지 꽃이 아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피워내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이제 안다.
나누어진 씨앗은 기억을 뿌리고,
그 기억은 다시 피어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나는 씨앗을 전하고 싶다.
글이라는 흙 속에,
기억이라는 마음 위에,
이 작은 씨앗 하나 놓아드린다.
천일 동안 붉게 피는 마음
그 마음을 당신도 피워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