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5일 탄생화
저는 크라운 베치(Crown Vetch, Securigera varia)라고 합니다.
‘왕관을 쓴 싸리꽃’이라 불리지만, 사실 저는 싸리가 아닙니다.
유럽의 초원과 언덕에서 태어난, 조용하고 단단한 콩과의 들꽃이지요.
봄부터 여름,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쬘 때
저는 작은 꽃들을 모아 둥근 화관을 만듭니다.
하얀색과 연분홍, 연보라가 어우러져
작은 왕관처럼 보인다고 해서
사람들은 저를 ‘Crown Vetch’라 불렀습니다.
그 이름 속에는 화려함보다 겸손한 품격이 담겨 있습니다.
유럽의 옛 화가들은 저를 거의 그리지 않았습니다.
너무 작고 흔한 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세기 식물학자들의 도감 속에서는
세밀한 붓끝으로 제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의 학명은 Coronilla varia.
꽃 한 송이 한 송이를 정성스레 그린 보태니컬 리소그래프(식물학 판화) 속에서 저는 처음으로 ‘예술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림 속의 저는 왕관 대신 고개를 숙인 꽃이었습니다.
화려한 장미나 양귀비 옆에서도 묵묵히 빛을 내며,
겸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지요.
그 한 장의 그림은 지금도
영국과 프랑스의 오래된 식물학 도감 속에 남아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현대에 들어와서야
저는 다시 예술의 세계로 돌아왔습니다.
미국 화가 Nancy J. Pallan은 저를 수채화로 그려
‘Crowned Vetch’라 이름 붙였고,
또 다른 화가 Barbara Traficonte는
‘Field of Purple Crown Vetch’라는 파스텔화로
초원의 빛을 담아주셨습니다.
그림 속의 저는 여전히 고요하지만,
바람과 햇살 속에서 부드럽게 흔들립니다.
사람들은 저를 비탈의 수호자(The Guardian of the Slope)라 부릅니다.
튼튼한 뿌리가 흙을 붙잡고,
비와 바람 속에서도 무너짐을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세상의 경사를 단단히 받쳐주는 존재입니다.
제 꽃말은 사랑, 화합, 다정함입니다.
수많은 작은 꽃이 모여야
비로소 하나의 왕관이 완성되듯,
사람과 사람도 서로 기대어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빛을 냅니다.
저는 크라운 베치,
왕관을 썼지만 결코 높지 않은 꽃입니다.
흙 가까이에서,
사랑과 다정함으로 세상을 붙잡고 살아가는
작은 왕국의 여인입니다.
“사랑은 높이서 빛나는 왕관이 아니라,
서로를 지탱하는 뿌리의 고리에서 자란답니다.”
– 크라운 베치 드림
학명: Securigera varia (syn. Coronilla varia)
영어명: Crown Vetch
한글명: 크라운 베치
과명: 콩과(Fabaceae)
원산지: 유럽
꽃말: 사랑, 화합, 다정함
등장 자료: 19세기 도감 「Curtis’s Botanical Magazine」 외
현대 작품: Nancy J. Pallan, Crowned Vetch (수채화) / Barbara Traficonte, Field of Purple Crown Vetch (파스텔화)
https://youtu.be/aKfoswRG1l8?si=DI9se5HK95m64UX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