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머위 - 여름철 입맛 돋우는 쌉싸름한 어머니의 손맛

11월 17일의 탄생화

by 가야

11월 17일의 탄생화 – 머위(Butterbur)


꽃말: 사랑의 시작


봄이 다가오면, 저는 머위 생각이 납니다.


겨우내 눈에 덮여 있던 땅속에서 가장 먼저 연둣빛 새순을 내밀던 그 식물,
머위는 제게 언제나 봄의 전령이었습니다.


찬 바람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날, 그 조그만 순이 땅을 밀어올릴 때면
“이제 곧 따뜻해질 거야.”
그렇게 머위는 제게 봄의 시작을 알려주곤 했습니다.

저는 국화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이지요.
학문적으로는 Petasites japonicus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포니쿠스(japonicus)’라는 말은 일본에서 처음 기록되었다는 뜻이지만,
저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사할린 등
동아시아 곳곳의 습하고 그늘진 땅에서 자라왔습니다.

봄이 오면 저는 눈보다 먼저 깨어납니다.
아직 찬바람이 남아 있을 때,
제 흙 속의 뿌리줄기에서 작은 꽃대가 올라오지요.


하얗거나 연자주빛 꽃들이 피었다 지고 나면,
그 자리에 크고 둥근 잎이 펼쳐집니다.


여름이 되면 제 잎은 그늘을 만들 만큼 넓어지고,
가을이 오면 뿌리줄기를 남긴 채 조용히 잠이 듭니다.


그러다 다시 봄이 되면,
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새싹을 밀어올립니다.


그것이 제가 살아온 방식입니다.

저의 또 다른 이름, 버터버(Butterbur)


저에게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버터버(Butterbur)’라고 부릅니다.


이 이름은 먼 유럽에서 태어났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냉장고가 없던 시절
유럽 사람들은 버터나 치즈를 제 잎으로 싸서 시원한 곳에 두었다고 합니다.


넓고 두꺼운 제 잎이 수분을 품어
버터를 신선하게 지켜주었기 때문이지요.


그 후 사람들은 저를 ‘버터를 감싸는 잎’,
즉 ‘Butterbur’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제 고향이 동양인데,
이름은 서양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사람들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동양에서는 봄의 나물로,
서양에서는 버터를 감싸던 잎으로,
그리고 때로는 약초로 불리며 말이지요.


세상은 다르지만,
사람들이 저를 통해 느꼈던 ‘자연의 위로’만큼은
동서양을 가르지 않고 닮아 있었습니다.


머위, 사람 곁에서 자라온 풀


우리나라에서는 습한 들이나 시냇가, 그리고 농가의 담장 밑에서도 자주 자랍니다.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옆으로 길게 뻗어 번식하기 때문에,
굳이 재배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자라는 식물이지요.


옛날 시골에서는 머위를 일부러 심기보다
그냥 마당 한켠이나 담 밑에서 자라는 것을 꺾어 먹었습니다.


농산물을 돈으로 사고팔기 이전에는,
자연이 주는 식물을 그대로 밥상에 올리는 일이 당연했으니까요.


머위는 그저 “거기 있는 풀”,


그러나 봄이면 누구보다 먼저 찾아오는 소중한 손님이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어느 분이 주신 머위 뿌리를 화단에 심어본 적이 있습니다.
가꾸지 않아도 매년 새순이 돋고, 잎이 무성히 퍼졌지요.


크고 넓은 잎 아래로 작은 곤충들이 숨어들고,
비가 내릴 땐 머위 잎이 우산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때 저는 머위가 ‘키우는 식물’이라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식물’이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머위 잎 아래의 전설


머위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 사할린, 시베리아 등
동아시아 전역에 자생합니다.


일본 홋카이도 지역의 아이누 사람들에게는
머위 잎 아래에 사는 작은 존재들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코르포쿠르(Korpokkur)’라는 요정 같은 종족이지요.
그들은 머위 잎을 지붕 삼아 살았다고 합니다.


저는 그 전설을 처음 들었을 때,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작은 생명에게 머위 잎은 하늘이자 집이었겠지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도 스스로 살아가는 머위의 강인함은
이야기 속 요정들에게 쉼터가 되어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살아가는 식물이라는 점에서
머위는 어쩌면 사람보다 더 오래된 지혜를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머위의 효능과 주의점


머위에는 항염·진정 작용을 돕는 성분이 들어 있어
예로부터 감기나 기침을 다스리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봄철 입맛이 없을 때 머위나물을 먹으면
쌉싸름한 맛이 입맛을 돋워주고 소화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지요.


하지만 머위에는 ‘피롤리지딘 알칼로이드’라는 독성 물질이 극소량 들어 있어
과량 섭취하거나 장기간 복용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머위는 생식보다는 데치거나 삶아서 먹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렇게 손질하면 쓴맛이 사라지고,
머위 본연의 향과 부드러운 식감이 살아납니다.


들깨머윗대볶음, 봄의 깊은 맛


봄철 머윗대가 연해지면 들깨가루를 넣어 볶아 먹는 반찬이 참 맛있습니다.


삶은 머윗대를 들기름에 볶다가 된장 한 숟갈과 들깨가루를 더하면
머위의 쌉싸름한 맛이 부드럽고 고소하게 녹아듭니다.


씹을수록 은근한 단맛이 감돌고,
들깨 향이 입안을 포근히 감싸지요.


어머니는 늘 입맛이 없을 때 머윗대볶음을 꺼내 놓으셨습니다.


밥 한 숟갈 위에 머윗대를 얹어 비비면,
그 향과 맛이 봄의 기억처럼 되살아났습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마음을 채워주는, 그런 맛이었습니다.

봄의 기억 속에 피는 머위


예전에는 흔해서 귀하지 않던 머위가
이제는 시장에서 제법 비싼 나물이 되었습니다.


도시 사람들도 그 쌉싸름한 맛을 그리워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머위는 그저 들에 자라던 풀이 아니라,
지금은 봄의 향을 전해주는 소중한 식재료가 되었습니다.

봄이 오면 저는 다시 머위 생각을 합니다.


흙 속에서 힘겹게 얼굴을 내밀던 그 작은 새순이
언젠가 제 마음속에도 뿌리를 내린 듯합니다.


조용히, 그러나 꿋꿋하게 살아가는 그 모습이
어쩐지 사람의 마음과 닮아 있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https://youtu.be/DhHV66ZNZ54?si=zytobKjA78iqsrMj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크리스마스 로즈 - 향기로 가득한 꽃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