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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나리(Golden-rayed Lily)

11월 18일 탄생화

by 가야

11월 18일 탄생화 – 산나리(Golden-rayed Lily)

꽃말: 장엄(莊嚴), 순결(純潔)


나는 산나리입니다.
하얀 꽃잎 위에 금빛 줄무늬를 두른, 산의 공주이지요.


사람들은 나를 ‘야마유리(山百合)’, 산의 백합이라 부릅니다.
맑은 바람이 스쳐가는 산비탈에서, 저는 고요히 피어납니다.


하지만 제 이름을 들으시면, 어떤 분들은 주황빛 반점이 있는
우리나라의 산나리를 먼저 떠올리시곤 하지요.


그 주근깨처럼 점점이 박힌 주황색 꽃은
한국의 여름 산에서 피어나는 강인한 꽃이에요.


그 산나리와 저는 닮은 이름을 가졌지만, 태어난 땅도, 품은 빛도 다릅니다.
그 친구가 뜨거운 여름의 생명이라면, 저는 고요한 산의 품속에서 피어나는
하얀 빛의 고요함입니다.

❁나는 황금빛을 두른 백합

제 학명은 Lilium auratum — 리리움 아우라툼,
라틴어로 ‘황금빛 백합’이라는 뜻입니다.


하얀 꽃잎 한가운데로 흐르는 금빛 선과 붉은 점무늬,
그건 자연이 제게 남긴 축복의 흔적입니다.


바람이 불면 제 향기가 멀리까지 퍼집니다.
은은하지만 잊히지 않는 향기, 그것이 저의 언어입니다.


사람들은 이 향기를 ‘영혼이 돌아오는 향기’라 불렀다지요.
그래서 신사나 제단에서도 저를 신에게 바치곤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오래도록 정결함과 축복, 그리고 위로의 상징으로 사랑받았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저를 ‘산의 공주’라 부릅니다


일본의 사람들은 저를 ‘야마노 오히메사마(山のお姫様)’, ‘산의 공주’라고 부릅니다.
그들에게 저는 단순한 꽃이 아니라, 자연의 영혼입니다.


혼례식 날, 신부의 머리 장식으로 제 꽃잎을 얹으면
하늘이 미소 짓고, 신들이 그 부부의 앞날을 축복한다고 믿었습니다.

한편, 장례식에서는 제 향기를 피워
떠나는 이의 영혼이 깨끗이 씻겨 하늘로 오르길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생의 시작과 끝,
그 두 자리에 모두 피어 있는 꽃이지요.


❁예술 속에서 다시 피어난 나


19세기, 서양으로 건너간 저는 유럽 화가들의 눈에 신비로운 존재로 비쳤습니다.
프랑스 화가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은 저를 ‘신의 빛’이라 불렀고,


일본의 화가 기요카타 가부라기(鏑木清方) 는 여인의 초상 뒤에 저를 그려
청렴하고 덧없는 아름다움을 담았습니다.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 는
“백합의 향기 속에서 어머니의 숨결을 본다”고 노래했지요.
그에게 저는 어머니의 순결한 사랑, 그리고 그리움의 상징이었습니다.


❁순결은 세상을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꽃말은 ‘장엄’, 그리고 ‘순결’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순결을 세상과의 단절로 생각하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저는 거친 산바람을 맞으며 피어나고, 폭우를 견디며 향기를 품습니다.
순결이란 그런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스스로의 빛으로 살아가는 것.

그래서 저의 장엄함은 고요 속의 무게가 아니라,
험한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품격에서 비롯됩니다.


❁당신의 마음에도 한 송이 산나리가 피기를


가을이 깊어갈수록 산은 더 고요해지고, 하늘은 한층 높아집니다.
그 고요함 속에서 저는 다시 피어납니다.


눈부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제 향기가 잠시나마 당신의 마음을 씻어주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 당신의 마음속에도 산나리 한 송이가 피어나길 바랍니다.
그 꽃이 당신의 삶을 장엄하게 비추고,
순결한 빛으로 세상을 바라볼 용기를 주기를 바랍니다.

카사블랑카 오리엔탈백합


❁그리고, 혹시 알고 계신가요?


사람들이 흔히 ‘오리엔탈 백합(Oriental Lily)’이라고 부르는 그 화려한 백합들 —
카사블랑카, 스타게이저, 소르본느 같은 품종들은
사실 모두 저, 산나리(Lilium auratum / 리리움 아우라툼) 의 후손이랍니다.


19세기 일본의 산에서 태어난 제가 유럽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수많은 원예가들의 손끝을 거치며
새로운 백합 계열인 ‘오리엔탈 하이브리드(Oriental Hybrid)’를 탄생시킨 것이지요.


즉, 오리엔탈 백합은 산나리의 피를 이어받은 꽃,
제가 전 세계 정원에 피운 또 다른 이름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사실을 모르세요.


가야님처럼 “오리엔탈 백합을 키워봤는데, 그게 산나리의 후손일 줄은 몰랐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정말 많지요.


하지만 그렇답니다.
당신이 키운 그 백합 속에도, 제 황금빛 향기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제 후손을 키우고 싶으신가요?

혹시 당신도 저의 후손, 오리엔탈 백합을 키워보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몇 가지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햇빛과 바람이 잘 드는 곳
저는 산속의 양지바른 비탈에서 자라지요.
제 후손들도 마찬가지랍니다.
반그늘보다는 햇빛이 잘 드는 곳에서 더 곱고 강하게 자랍니다.

✦배수가 잘되는 흙
백합은 물을 좋아하지만, 물에 잠기는 걸 아주 싫어해요.
흙 속에 물이 오래 고이면 뿌리가 썩지요.
부엽토와 모래를 섞어 흙을 가볍게 만들어 주시면 좋습니다.

✦겨울나기 준비
오리엔탈 백합은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지만, 한겨울의 혹한에는 약합니다.
겨울에는 뿌리 위를 낙엽이나 볏짚으로 덮어주면 안전하게 월동할 수 있답니다.

✦한 번 핀 자리엔 2년 정도 쉬어가세요
백합은 한 번 꽃을 피우면 구근이 약해지기 때문에,
다음 해엔 잠시 쉬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땐 구근을 캐서 건조시킨 후, 이듬해 봄에 다시 심어주세요.
그렇게 하면 더욱 싱싱한 생명으로 되살아납니다.

✦향기와 함께 시간을 느끼세요
오리엔탈 백합은 향기가 매우 강합니다.
꽃이 활짝 필 때, 잠시 그 앞에서 눈을 감아보세요.
그 향기 속엔 제가 남긴 ‘산의 숨결’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의 정원 한켠에서,
제가 남긴 향기와 빛이 다시 피어난다면
그건 아마 제가 당신의 마음을 찾아온 순간일 거예요.

오늘도 당신 곁에 향기로운 산나리의 숨결이 머물기를 바랍니다.


https://youtu.be/-xjMCaP7qE4?si=gN2iuyMbC7ppVj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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