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1일 탄생화
저는 초롱꽃을 참 좋아했습니다.
여름이면 화단 가장자리에 파란 종이 주렁주렁 달리듯 피어 있었지요.
바람이라도 불면 은은히 흔들리며 작은 종소리를 내는 듯했어요.
그 모습이 마치 누군가를 조용히 기다리는 듯 보여서, 한참을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초롱꽃은 생각보다 강한 식물이었습니다.
처음엔 그 생명력이 든든했지만, 어느 날부터는 다른 꽃들의 뿌리를 밀어내며 화단을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저는 마음 아픈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어요.
‘함께하고 싶었지만, 너무 번식이 잘 되는구나.’
그리하여 초롱꽃은 우리 화단에서 퇴출된 첫 번째 아이가 되었지요.
그래서일까요. 지금도 길가나 산책길에서 초롱꽃을 보면 복잡한 마음이 듭니다.
너무 사랑했기에 보내야 했던 꽃, 그래서 제게 초롱꽃은 애증의 존재로 남았습니다.
초롱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북아메리카의 온대 지역 전역에서 자생합니다.
라틴어 이름 Campanula는 ‘작은 종(little bell)’이라는 뜻으로,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하늘의 종’, ‘요정의 종소리’를 상징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캔터베리 벨(Canterbury Bells)’이라 불리는 품종이 유명하지요.
중세 시대 순례자들이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가는 길가에서 이 꽃을 보며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롱꽃은 신앙, 헌신, 성실함을 상징하는 ‘순례자의 꽃’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벨 드 블뢰(Belle de bleu, 파란 종)’라 불리며
감사와 믿음, 그리고 오래된 사랑의 징표로 전해졌습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면서도 쉽게 잊지 못하는 마음, 그것이 프랑스인들에게 초롱꽃의 의미였다고 하지요.
일본에서도 초롱꽃은 사랑받는 여름꽃입니다.
‘釣鐘草(つりがねそう, 츠리가네소)’라는 이름으로,
슬픔 속의 청초함과 여인의 마음을 상징했습니다.
하이쿠 시인 바쇼는 초여름 풍경을 묘사할 때 이 꽃을 자주 등장시켰다고 합니다.
소리를 내지 못한 채 조용히 흔들리는 초롱꽃의 모습은, 말보다 깊은 그리움을 전한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저는 두 아이를 모두 키워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초롱꽃은 이웃집 담장 밑에서도 스스로 자라났고,
캄파눌라는 화분 속에서도 고운 빛을 잃지 않았지요.
그러나 그 아이는 겨울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씨앗을 받아두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그 후로 다시는 만나지 못한 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꽃도 사람처럼, 놓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인연이 있다는 것을.
한 계절의 끝에서 떠나간 그 푸른빛은,
지금도 제 기억 속에서 맑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소담스럽기로는 우리의 초롱꽃이,
선명한 푸른색이 주는 청량감은 캄파눌라가 빼어났습니다.
하나는 들판의 바람에 흔들리고,
다른 하나는 정원의 햇살 아래 단정히 고개를 숙입니다.
초롱꽃은 그 맑고 고요한 색감 때문에 예술가들에게도 사랑받았습니다.
19세기 프랑스 화가 에밀 베르나르(Émile Bernard)는
자신의 수채화 ‘들꽃 정물화’에서 초롱꽃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진보라빛 종들이 한여름의 고요한 오후를 닮았고,
그 속에서 베르나르는 ‘겸손한 생명력’의 아름다움을 그렸습니다.
또 다른 프랑스 예술가 에밀 갈레(Émile Gallé)는
초롱꽃을 유리 공예에 새겨 넣었습니다.
그의 대표작 ‘Campanule Vase’는 푸른 유리 속에 투명한 종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이 가진 고요한 기도’를 느끼게 하지요.
초롱꽃은 갈레의 작품 속에서 ‘빛을 담은 영혼의 그릇’이 되었습니다.
영국 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Christina Rossetti) 역시 시 속에서 초롱꽃을
‘겸손하지만 진실한 마음의 상징’으로 노래했습니다.
그녀는 “초롱꽃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세상을 비춘다”라고 적었지요.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저는 우리 화단의 초롱꽃이 생각납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그늘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던 아이.
◆초롱꽃이 남긴 말 없는 가르침
초롱꽃의 꽃말은 ‘성실’, ‘감사’, ‘변함없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거기에 ‘사랑의 거리 두기’라는 의미가 하나 더 있습니다.
너무 사랑했기에 함께할 수 없었던 존재,
그것이 제 화단의 초롱꽃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저는 초롱꽃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한 계절을 묵묵히 지켜낸 그 성실함,
한 자리를 고집하며 다시 피워내는 생명력,
그 모든 것이 인간에게 필요한 덕목이기도 하니까요.
어쩌면 초롱꽃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이란, 꼭 곁에 있어야만 가능한 게 아니에요.
당신의 마음에 내 종소리가 닿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Campanula, Bellflower
학명: Campanula spp.
과명: 초롱꽃과(Campanulaceae)
꽃말: 성실, 감사, 변함없는 마음
원산지: 유럽, 아시아, 북아메리카
개화시기: 6~8월
https://youtu.be/Ef1HeAyTSnc?si=Wfu1RxweK_Nl38H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