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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취 5형제 이야기 – 닮은 듯 다른 들국화의 가을

가야의 꽃 이야기

by 가야

개미취 5형제 이야기 – 닮은 듯 다른 들국화의 가을 노래


가을빛이 점점 더 깊어질수록 산비탈과 길가, 바람의 결을 따라 흘러가는 들판에는 보랏빛 물결이 잔잔히 번집니다. 멀리서 보면 모두가 하나의 빛으로 흔들리는 듯하지만, 가까이 손을 뻗어 들여다보면 표정도, 향기도, 살아온 자리도 모두 다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비슷해 보이지만 결코 같은 적 없었던 다섯 송이의 들국화를 만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를 ‘개미취 5형제’라 부르지요. 개미취, 벌개미취, 좀개미취, 해국, 그리고 진다이개미취. 다름을 품고 나란히 서 있는 이 다섯 송이의 가을꽃 이야기를 이제 천천히 따라가봅니다.

꙳ 개미취 – 한국 땅에서 태어난 맏형


• 개미취

학명 Aster koraiensis

원산지 한국(특산)

꽃말 진실한 사랑, 기다림, 소박함


개미취(Aster koraiensis Nakai)는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토박이 꽃입니다. 산자락의 풀밭에서도, 도로와 만나는 경계의 땅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단아함은 쉽게 지나칠 수 없습니다. 곧게 뻗은 줄기 위에 연보라색과 자줏빛 사이를 오가는 꽃잎이 가을 바람을 타고 흔들립니다. 끝까지 꿋꿋하게 피어 있는 꽃,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계절을 끝없이 바라보는 꽃.


옛 전쟁통, 연인을 기다리던 처녀의 눈물이 닿은 자리에서 처음 피어났다는 전설처럼, 개미취는 지금도 ‘기다림’, ‘변치 않는 마음’을 상징하며 조용히 들녘에 서 있습니다.


꙳ 벌개미취 – 바람을 따라온 이방인


• 벌개미취

학명 Aster pilosus

원산지 북아메리카(귀화종)

꽃말 희망, 개척, 포용


벌개미취(Aster pilosus Willd.)는 북아메리카에서 건너온 귀화식물입니다. 줄기는 가늘고 수줍게 갈라져 작은 꽃들이 수없이 피어납니다. 흰빛에서 연보랏빛까지 번져가는 색의 결은 마치 가을비가 잠시 흘리고 간 구름 같기도 합니다.


서부 개척 시대, 이 꽃이 피어 있는 땅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땅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벌개미취는 지금도 새로운 시작과 희망의 씨앗을 품은 들국화로 기억됩니다. 이방의 꽃이었지만 어느새 한국의 가을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습니다.


꙳ 좀개미취 – 작은 몸에 숨겨둔 단단함


• 좀개미취

학명 Aster ageratoides

원산지 한국·일본

꽃말 겸손, 정결, 은은한 기쁨


좀개미취(Aster ageratoides Turcz.)는 이름 그대로 키가 작습니다. 그러나 결코 연약한 꽃이 아닙니다. 반그늘과 숲 가장자리처럼 많은 생명이 스쳐가는 곳에서 묵묵히 피어납니다.


하루 이틀의 아름다움으로 끝나지 않고, 단단한 줄기와 넓은 잎으로 버텨내며 오랫동안 꽃잎을 빛냅니다. 옛 노승이 바위틈에 물을 주며 키웠다는 전설처럼, 이 꽃이 주는 메시지는 조용하지만 깊습니다. 겸손함이야말로 진짜 꽃이 피는 순간이라는 것. 산중의 고요한 호흡을 닮은 꽃입니다.


꙳ 해국 – 바다와 맞서 피어난 꽃


• 해국

학명 Aster spathulifolius Maxim.

원산지 한국 남해안·제주 해안

꽃말 인내, 굳은 의지, 변함없는 마음


해국(Aster spathulifolius Maxim.)은 해풍을 맞는 남해안과 제주 절벽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습니다. 높이는 20~40cm 남짓, 크지 않지만 두껍고 숟가락 모양인 잎은 바람과 염분을 견뎌낸 시간의 흔적입니다.


짙은 보랏빛의 꽃이 석양에 물들면, 단단한 암석 위에 꽃이 아니라 작은 불빛 하나가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폭풍에 떠나간 연인을 기다리며 절벽에서 기도하던 어부의 이야기처럼, 바위취는 끝내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약속을 품은 채 바다와 마주섭니다.

진다이개미취


꙳ 진다이개미취 – 서로 다름이 만나 꽃이 된 이름


• 진다이개미취
학명 Aster × jindaiense
원산지 일본(교잡종)
꽃말 조화, 화합, 다름 속 아름다움


진다이개미취(Aster × jindaiense Kitam.)는 일본에서 개미취와 벌개미취가 자연 교잡되어 태어난 식물입니다. 두 생명의 모양이 조화롭게 섞인 탓인지, 연보라색 꽃잎은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부드럽게 펼쳐집니다.
서로 다른 마을의 청년과 처녀가 이 꽃이 핀 밭에서 사랑을 맺었다는 전설처럼, 이 꽃은 다름 속의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다르다는 사실이 갈라짐이 아니라 연결이 될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을 이 꽃은 말없이 보여줍니다.

벌개미취

✾ 다섯 송이가 부르는 가을의 합창


산의 개미취, 들판의 벌개미취, 숲의 좀개미취, 바다의 해국, 그리고 서로를 품어낸 진다이개미취.


이 이름을 소리내어 읽어 내려가다 보면, 마치 다섯 줄의 현이 서로 다른 울림을 내며 같은 곡을 연주하는 듯합니다. 언뜻 닮아 있지만, 살아온 땅과 바람, 빛과 사랑의 이야기는 다 제각각이기에 더 아름답습니다.

가을 들판을 걷다 우연히 이 꽃들을 만난다면, 기억해 주세요.


다름이 갈라짐이 아니라, 다름이 곧 다채로움이라는 것을.


서로 다른 모습을 지닌 채 하나의 계절을 함께 만들어내는 다섯 형제처럼, 우리도 그렇게 서 있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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