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IT 10
It's not your fault.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부산 지역 180억 전세사기 피해 선고 공판이 열렸다.
전세 사기로 인해 229명에게 피해를 입힌 50대 범죄자에게 검찰은 징역 13년을 구형했고,
이를 담당한 박주영 판사는 이보다 더 높은 징역 15년의 형량을 구형했다.
이날 판사는 피해자들의 탄원서를 하나씩 읽으며 재판에 참석한 피해자들을 위로했다.
객관적으로 법리에 의거, 판결만 내리는 법정에서
판사는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씀”을 첨언했다 했다.
“험난한 세상에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기성세대로서 비통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사연을 읽고 또 읽었다.
여러분은 자신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말라.
탐욕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한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여러분과 같은 선량한 피해자를 만든 것이지
여러분이 결코 무언가 부족해서 이런 피해를 본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 달라.”
피해자 중 일부가 눈물을 터트렸다.
열심히 살았던 선량한 사람들,
당신들은 잘못하지 않았다는 말이
불운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던 그들의 마음에 온기를 가져다줬다.
살다 보면 겪게 되는 수많은 고통과 불운이 있다.
때로는 그것들이 나의 선택과 상황으로 인해 유발되기도 하지만,
전혀 예측불허의 순간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나의 무언가가 이러한 고통을 유발하는 건지 내 삶을 돌아보고, 나를 자책하게 된다.
심지어 이러한 불운이 반복되면 마지막 남은 희망의 끈마저 놓아버리곤 한다.
평생을 나보다 남을 위해 산 사람에게도 불행은 피해 가지 않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이름 모를 아기들에게도 고통이 찾아온다.
무엇이 잘못됐기에 이러한 불행이 찾아왔을까.
그리고 그 불행 앞에 우리는 어떠한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우리가 종종 잊곤 한다. 불행이 오롯이 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걸.
내가 뭔가 해볼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불행 앞에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생 영화 중 하나인 “굿윌 헌팅”의 명장면이 있다.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불우한 가정사로 스스로 자멸의 길을 가고 있었던 MIT 청소부윌 헌팅(맷 데이먼)과
그를 세상 밖으로 꺼내기 위해 상담을 시작한 숀 교수(로빈 윌리암스).
어릴 적 트라우마가 강해 상담이 불가능하고 공격적이었던 윌 헌팅에게
무한한 인내심으로 다가가 멘토가 되어준 숀 교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윌 헌팅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어찌 보면 서로가 미숙하고 비슷한 아픔을 견뎠기에 서로를 알아본 둘은
대립 속에서 한 발짝 관계를 전진했고, 숀은 윌 헌팅이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려줬다.
어느 날 윌 헌팅에게 숀이 말한다.
“It's not your fault.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
<사진 출처 영화 굿윌 헌팅>
“너의 잘못이 아니라”라는 말 한마디.
윌 헌팅은 참아왔던 세월의 아픔을 토해내며 오열하고 만다.
천재적 능력을 지녔지만 어린 시절 학대와 수차례의 파양으로 엇나간 인생을 살던 그에게
세상은 모두 그의 잘못이라 했다.
단 한 명도 그것이 윌 헌팅의 잘못이 아니라며 이야기해 준 사람은 없었다.
윌 헌팅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이야기를 누구도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았다.
나약한 어린 시절 그가 받았던 고통과 불운, 상처의 시간들.
그 시절 그 순간을 보듬어줄 누군가의 따뜻한 시선과 도움이 있었더라면
그는 스스로 자신을 파멸시키는 우둔한 인생을 살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 출처 폼페이 유물전 더현대>
폼페이 유물전에 다녀왔다.
대학 시절 유럽여행 때 직접 폼페이에 간 적이 있다.
인생 첫 해외여행이기도 했지만 역사 교과서에서만 존재했던 화산폭발의 순간.
그 고통이 그대로 멈춰진 폼페이의 유물 현장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땅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으로, 누군가는 서 있는 모습으로 찰나의 순간,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불운의 죽음을 맞게 된 폼페이 사람들.
웅크리고 있던 폼페이의 사람을 목도한 순간은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열린 폼페이 유물전은 물론 그때의 전율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과거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수려한 로마 시대 유물과 생활상은
그들이 맞게 될 미래의 “불운”으로 사라져 버리기엔 너무나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폼페이 유물전 입구엔 폼페이 낙서의 한 구절이 있었다.
<사진 출처 폼페이 유물전 더현대>
“POMPEIOS DEFER, UBI DULCIS EST AMOR.
감미로운 사랑의 도시 폼페이로 저를 데려가 주세요.”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신들의 서사가 흐르는 아름다운 사랑의 도시 폼페이였다.
폼페이에 남겨진 럭셔리한 빌라에서 나온 유물 중에는
신들을 묘사하는 장식품과 그림, 정원, 도자기 등이 있었다.
곳곳에 존재하는 벽화와 낙서들에는 사랑의 언어들이 흐르고 있었다.
지상의 낙원 같았던 그곳에 인류 최대의 불행이 닥칠 거라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전시장 한 켠에 미디어 아트가 역사의 그날,
한 럭셔리 빌라의 외관을 재현해 보여주고 있었다.
새가 지저귀고, 햇살이 내리쬐며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건축물의 정원이었다.
여느 때처럼 별반 다를 게 없었던 평화로운 하루였다.
저 멀리 보이는 화산이 꿈틀거리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들이 사라져 버리고 땅이 붉게 끓어올랐다.
순식간이었다. 화산이 폭발하고 도시가 잿더미로 변한 것은.
평화로운 일상과 젊은 연인들의 사랑의 속삭임이 가득했던 하루였을 것이다.
폼페이 사람들에게 어떠한 저주가 내린 것일까.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천재지변. 그로 인한 불운.
하루아침에 공기처럼 사라진 그들에겐 석고물이 부어져 죽어도 죽지 못하고,
후세의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느낀다.
순식간에 휘몰아친 천재지변.
죽어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현존하는 그들의 모습 앞에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은 자신의 미래를 알았을까.
영원히 박제되어 고통을 보여주는 그들의 삶. 폼페이는 잘못한 것이 없었다.
폼페이 유물전의 출구 앞 이런 구절이 쓰여있었다.
“고통이 가라앉으면 사랑이 다시 찾아올 거예요, 저를 믿으세요.
SI DOLOR AFUERIT CREDE REDIBIT AMOR”
<사진 출처 폼페이 유물전-더 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