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나'야
글을 쓰기 시작한 뒤로,
누구를 만나든 어떤 상황을 겪든
결국 마지막엔 언제나 ‘나를 돌아보는 이야기’로 돌아온다.
“나는 왜 이 나이에, 지금에서야
내가 궁금해지고, 나를 찾아가는 길 위에 서 있을까?”
예전에는 떠 오르지도 않았던 의문이
요즘은 생생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찾아온다.
그 질문들을 비로소 들여다보게 되니, 이상하게 반갑다.
그런데, 조금 부끄럽고, 조금 어색하고,
어쩐지 새 출발선 앞에 선 사람처럼 낯설다.
나는 인생 대부분을 ‘해야 한다’로 살아왔다
성적, 경쟁, 합격, 성취.
그런 것들이 곧 나의 가치였고, 존재 이유였고,
인정과 사랑의 증거라고 믿었다.
그러니 감정과 감성은 내 것이 아니었다.
생각은 늘 눈앞 일만 따라갔고,
사유와 성찰은 언제나 멀리 두었다.
내면은 모른 척했고, 어려운 영역이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내 마음이 어떤 모양인지, 어떤 색깔인지,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요즘 들어 브런치 글을 읽으면
내 안에서 이상한 감정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감정들을 글로 적어 내려가다 보면,
나는 같은 자리에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일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 자리가 내가 지나가야 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지점을 다시 써본다.
따뜻한 문장, 깊은 통찰, 철학적 사유, 단단한 서사.
그런 글을 마주하면
그저 조용히 멈춰 선다.
내 안의 어떤 감정이 작은 진동처럼 일어나는 걸 느끼며.
한때는 이런 순간을 불편해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게 됐다.
그 글이 가진 힘에 주목하기보다,
내가 그것 앞에서 어떤 반응을 하는지를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된다.
그런 흐름 속에서,
내 반응 하나하나에도 귀 기울이게 된다.
글 앞에서 머뭇거리는 순간들까지도.
잘 쓴 글에 필요하다는
문장력, 진정성, 구조, 통찰, 완성도.
솔직히 그런 건 잘 모르겠다.
다만, 어딘가 내 마음을 지나가야
비로소 손가락이 간다.
이상하게 마음이 멈출 때가 있다.
글이, 나의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신호처럼.
그럴 때면 다시 읽고,
나도 꺼내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런 순간마다
나는 다시 나를 바라보게 된다.
익숙했던 감정들을 새롭게 마주하고,
지나쳤던 반응들에
작은 질문들을 붙여본다.
“이게 뭐지?”
“왜 이런 사소한 감정들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지?”
“이 반응은 나에게 무슨 말을 걸고 있는 걸까?”
예전 같았으면
덮어두고 지나쳤을 것들을,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게 다룬다.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그리고 그제야—
융의 말이 제대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는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화해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외면해 온 그림자들.
열등감, 나약함, 쉽게 흔들리는 마음,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오래된 습관들.
그것들은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인간답게 만드는 본질이었다.
돌아보면 나는 이 그림자들을 떨쳐내려고
참고, 숨기고, 지우고, 외면하고,
시간에 던져 사라지길 바랐다.
하지만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더 깊이 숨어들 뿐이다.
다시 바라보며, 그 의미를 새로 읽는다.
지금 내게 찾아온 이 사유의 시기,
이 느리고 진지한 성장의 시간은
‘늦은 것’이 아니라
비로소 때가 된 것이었다.
어린 시절 묻어둔 질문들이 떠오르고,
청년기에 미뤄둔 감정들이 말을 걸고,
단 한 번도 발화되지 못한
내 안에 오래 쌓여 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금 돌아왔을 뿐,
지금이야말로 익어가는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평가하는 마음도,
움츠러짐도
누군가의 글 앞에서 잠시 멈칫 하는 순간도
이것들은 나의 못남이 아니라
내 안에 쌓여 온 이야기다.
불완전하고 흔들리던 시간들,
결국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이제는 안다.
그조차도 나의 일부였다는 걸.
그림자를 인정하고 나니,
마음 어딘가가 조금 더 단단해졌다.
숨밍아웃을 하니
그림자의 커밍아웃도 따라온다.
참 낯설지만, 참 아름다운 일이다.
지금 나는
나를 알아가는 길의 정중앙에 앉아 있다
부끄러움, 고백, 성장, 성찰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시간.
늦으면 어떠랴.
유치하면 어떠랴.
철없으면 어떠랴.
나는 나일 뿐이다.
어떤 누구와도 같을 필요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슷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나로서 우뚝 서면 되는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그림자와 마주 앉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익숙하고도 낯선,
나를 다시 만난다.
이 시간을 산다는 것,
이 성장의 순간을 겪는 것.
참 다행이고
참 고맙다.
* 추신: 어제는 그랬다. 그런데 발행하려 다시 읽어보니 마음이 또 달라져 있다. 글도 마음도 창피하면서도 놀랍다. 무상(無常)이란 말이 훅 들어오면서 잠시 멈춘다. 그래도, 발행을 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