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남잘 ‘A’라고 부르기로 했다.
A는 늘 편안해 보이는 캐주얼 차림에 햄버거를 이미 먹어치운 건지 음료수만 홀짝거릴 때도 있었고,핸드폰이나 노트북을 켜놓고 열중하고 있기도했다.하지만 대부분은,입가에 묻은 육즙이 밴 소스를 쓰윽 닦아가며 그 밤에,곱슬거리는 앞머리를 살짝 늘어뜨린채 햄버거를 우걱거리며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일요일엔가,그가 늘 앉던 자릴 등산복을 입은 아저씨가 차지하고있던 날엔,불현듯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굶기에 익숙한 나는 이런 마음이 ‘감정적 허기’라고 치부했지만,다음날의 산책 시간을 기다리는 자신을 보며 스스로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습기가 안개처럼 꽉 찬 어느날,막 러닝머신에서 내려온 나는,냉장고에서 사각형의 치즈 한 조각을 꺼낸 후 20개의 조각으로 정성들여 자르면서 A에 대한 감정의 퍼즐을 맞춰보았다.
사실, 첫 눈에 무의식적으로 직감했듯 그의 도드라진 각진 턱과 희멀건 얼굴,파마를 한건지 원래 그런건진 알 수 없지만,힘없이 헝클어진 곱슬머리는 누군가를 떠오르게 했다.
9년 전,갓 스물이 되던 해,대학입시에 실패하면서 몸과 마음이 더욱 쪼그라들었던 참이었다.엄마 아빠 중 누구도 내 입시에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고 당장 직딩이 돼서 집안 생계에 도움이 되도 모자랄판이었지만 가고픈 대학에 대한 이상한 집착이 생겨 재수를 선택했었다.
같은 재수생이었던 고 3때의 짝 S가 다른 친구들과 함께 만나자고 제안했고,나는 혜화역에서 약속시간에 제일 먼저 나와있던 그 녀석을 처음 보았다.
도착한 순간,늘어뜨렸던 곱슬머리를 천천히 젖히며 나를 바라보았던 그 애,S의 남사친 J.
<늑대의 유혹>의 강동원 우산씬 저리가라할 그 어메이징한 모먼트는 수많은 사람들로 혼탁해진 배경이 지워지는 마법과 함께,첫사랑의 시작을 알렸다.정확히 말하면 내 첫 번째이자 마지막 사랑이었지만.
“걔, 완전 몰락한 귀족집 외아들같지”
S가 J에 대해 키득거리며 속삭이듯 한 말이었다.나는 그 때 오랜만에 큰 소리로 웃었는데 아마도 그가 희고 마른데다가 약간은 음지식물처럼 어두운 분위길 풍기는 게 S의 묘사와 기가막히게 잘 맞았기 때문이었을거다.
첫사랑은 재수시절 내내 나를 달뜨게 했다.
나는 대학생이던 그의 SNS를 염탐하거나 S와 나눈 카톡메시지를 통해 그를 탐구하고,아주 가끔은 S무리와 어울려 아무렇지 않은 척 그와 만나기도 했다.내가 탐구한 그는 약간 낮고 차분한 목소리를 가진,말하기보다 듣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술을 잘 마시지 못했고 절대 욕을 섞어 쓰지 않았으며 웃음장벽이 낮았지만 실없지 않았고 섣불리 남 이야기를 잘라먹거나 끼어들지 않았다.
'어떤 영화를 좋아하냐'고 물었던 적이 있는데,'대부분의 영화를 좋아하지만,신체를 훼손하는 장면이 있는 영화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했다.좋아하는 건 명료하지 않았지만 싫은것에 대해선 확고했다.나는 그를 탐구할수록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차라리 덕질에 가까웠다.그와의 연애를 감히 꿈꾸지 못하는 상태.그 아이가 너무 높고 귀해서 작은 표정,하찮은 몸짓에 의미를 부여하고,마침내 그 아일 동경하면서 그에게 살얼음같이 위태로운 불가침의 결계를 씌웠다.
하지만,딱 6개월 후 그가 여친이 생겨 푹 빠져있단 얘기에 상처받고 나가 떨어졌다.J의 카톡 프로필 사진은 지체없이,남들만큼이나 유치하게 그녀와의 인생 한 컷으로 바뀌었다.웃기는 건 그녀는 내가 꿈꾸던 이상의 나였다.마르고 희고 맑은.그리고 무엇보다 자기자신이 너무 밝아서 주변 또한 쉽게 밝히는.
나는 그 때 살찌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 아이에 비해 모든게 턱없이 부족한 탓이란 생각에 더 마르지 않은 것에 대해 한탄했고 내가 제일 잘하는 ‘굶기’를 더 열심히 하지 못한걸 자책했다.가난한 재수생이던 나는 그저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J에게서 마음을 떼놓고 나선 한동안 극심한 허기의 벼랑끝에서,‘ 폭식’이란 악셀레이터를 밟아버렸고 찢어진 마음 속에 숨어 자주 울었다.
그러니까 A를 처음 봤을 때 도망치고 싶었던 감정은,경멸감이 주가 아니라 이런 감정의 데자뷔가 겁이 났기 때문이었을 거다.몰락한 귀족의 외아들은 택도 없고,건장하고 믿음직한 집사정도는 돼보이는,하지만,곱슬머리때문인지 희멀건한 얼굴 때문인지 왠지 닮은 듯 묘한 분위기가 나를 겁먹게 했던 거다.
나는 엄지 손톱만한 크기의 치즈 조각을 누군가의 장례식에나 어울릴법한 흰 국화 송이가 그려진 아끼는 접시에 담아 오물오물 씹으면서 잡념을 떨쳐버리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보았다.그리고 진작에 흐물흐물 녹아버린 치즈를 천천히 목구멍 안으로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