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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럭키젤리 Jul 15. 2024

3. 우리 집의 Supplier와 Manager

가정주부가 하는 수많은 일들에 대하여

독일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독일어 어학원을 등록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손 놓고 있었던 독일어 공부에 대한 열망도 있었지만, 사람을 사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도 했다. MBTI가 극 E인 나는, 사람과의 상호작용과 관계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기 때문에 남편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사귀어야만했다. 


학원 수업 첫날. 어느 회화수업에서 그렇듯 자기 소개 시간이 있었다. 간단히 어디서 왔는지, 하는 일은 무엇인지, 왜 독일에 왔는지 정도의 내용들이었다. 나는 직장을 휴직하고, 남편을 따라 독일에 오게 되었으며, 그래서 지금 난 집에서 집안일을 하면서 지낸다고 말했다. 요리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장황하게 내가 집에서 하는 일들을 설명했는데, 이걸 한마디로 표현할수 있는 단어가 있었다. "Hausfrau"! 독일어로 가정주부라는 뜻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가정주부다. 그런데 내가 나 자신을 가정주부로 소개하는게 왜 이렇게 초라하게 느껴지는걸까?


물론 가정주부 혹은 현모양처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의 가치추구를 존중한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집안일이 싫다. 진심으로 너무 싫지만, 그렇다고 미루거나 대충하지는 않고 있다. 현재 나에게 주어진 책임(?)이자 업무는 집안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입독 초반에는 매일 세번씩 청소했다. 쓸고, 청소기 돌리고, 닦고, 정리하고. 겨우 두 명이 사는 집인데 왜 매일매일 청소해도 집은 어질러지는 것일까. 독일은 외식/배달물가가 비싸기도 하고, 한식을 선호해 하루 세 끼를 전부 요리해 먹는다. 요리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성취감은 우울증 극복에도 도움이 된다고도 한다. 하지만 난 요리로 얻는 성취감 보다는 재료를 준비하고, 나의 작은 성취를 10분만에 먹어치우고, 또 끝없이 치우고 정리하는 과정이 더 길고 지난하게 느껴진다. 


가사일은 생각보다 많은 능력을 요구한다. 머리로는 어떻게 집안 살림을 경영할지 생각해야하며, 그걸 육체 노동으로 실행한다. 하지만 가정주부는 노동에 대한 대가를 딱히 받지 않기 때문에, 그 능력을 인정받기가 마땅치 않다. 내가 가사일이 싫은 이유가 여기 있다. 생각보다 많은 능력치를 요구하면서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귀찮아서 청소를 며칠동안 미루면 집이 쓰레기장이 되지만, 매일 청소를 해도 어질러지는 건 한순간이라서 청소한 티가 안난다. 매 끼니 요리를 해도 말수가 적은 남편은 '맛있다'라는 담백한 칭찬의 말 한마디 뿐, 그게 나에게 특별한 보상이 되지는 않았다. 출근시간에 맞춰 같이 일어나 집안일을 시작해서, 함께 잠들 때까지도 소소하고 바지런하게 집을 가꾸고 남편을 내조하지만 당연히 그 어떤 추가수당은 없다. 내가 들이는 정성에 비해, 가정주부라는 단어는 나의 노력을 어딘가 평가절하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 물론 타인이나 사회로부터 인정 받을 때, 큰 성취감을 느끼는 유난한 내 성격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종종 어느 드라마에서 들어본 것 같은 그런 대사들도 가끔 떠올랐다. '넌 집에서 쉬잖아'. 회사에서 받는 여러 업무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맞지만, 집에서 쉬기만 하는 것은 절대 아닌데 말이다. 


그러다 우연히 커뮤니티에 떠도는 글귀를 보게 되었다. 가사노동 중 식사 준비는 단순 요리, cook, 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냉장고의 재료들을 파악하고, 알뜰하게 식재료를 장보고, 재료를 다듬고, 남은 음식들을 처리하고 뒷정리하는 것의 일렬의 과정은 Food Supplier 나 Refrigerator Manager 에 훨씬 가깝다는 것이었다. 공급망 관리는 경영활동에서 나름 전문성을 요하는 중요한 직무 중에 하나이다. 원활한 공급망 관리로 회사를 잘 경영하고, 직원이 직무를 잘 수행하면 그에 따른 보상이 있다. 월급, 성과급, 복지, 승진, 개인 커리어 개발 등등... 반면에 집안의 대소사를 경영하고, 냉장고를 관리하고, 집안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 집이라는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은 주부인데, 월급, 복지, 승진, 개인커리어 개발은 커녕 그 어디에도 명함에 새겨 나를 소개 할 수 는 없다. 


가정주부가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 느낄만한 성취감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가사일의 최종 목표는 가족의 행복, 편안함, 평화일 것이다. 그래서 '이래서 사람들이 자녀를 낳는구나'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가사와 육아를 함께하면, 한 생명을 온전한 사회성을 가진 인간으로 키워내서 독립시킨다는 어느 정도의 사명감과 목표의식, 보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 부부는 자녀계획은 없다.) 그러면서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가족의 평화와 편안을 위해서 몇십년간 묵묵히 가사일을 하셨고, 가정을 지켜오셨다. 그리고 난 그런 엄마에게 오늘도 영상통화로 화장실 청소가 너무 하기 싫다고 징징거렸다. 아무래도 나는 가정의 평화와 안정만을 바라보고 집안일을 하기에 아직 한참 철이 덜 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썸네일 사진 : 독일 베르히테스가덴, 알프스 산자락에 물든 저녁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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