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남편의 독일행은 내 의사가 정말 많이 반영된 결정이었다. 남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더 나을 수 있었지만, 나는 남편에게 꼭 독일이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아주 예전부터 "독일에서 살아보고 싶다" 라는 로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이 바램이 언제부터 싹트여왔던 것인지 생각해보니, 무려 20여년의 시간을 거슬러 중학교 시절까지 올라가게 된다.
내 이름이 조금 특이한 편이라 놀림받던 사춘기 시절, 개명이 하고 싶었다. 아빠는 당신이 직접 지은 내 이름에 늘 자부심을 가져왔기 때문에 개명을 절대 반대하셨다. 그리고 어느 날, 개명을 할 수 없는 아주 논리적인 이유를 들고 오셨다. 개명을 문의해볼까 하고 작명소에 갔는데, 내 사주팔자를 보더니, 지금 이름이 내 사주에 아주 딱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개명할 필요가 없다고... 그리고 동시에 나는 처음으로 내 사주팔자를 알게 되었다. 물의 사주이지만, 주위에 불이 너무 강해 물을 보충해줘야한다는 것. 그래서 물 건너 해외에 나가는 것이 도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물 보충과 물 건너 해외 가는 것의 연결고리가 맞나 싶지만, 그 당시에는 "해외에 나가야한다" 라는 말이 내 머리와 가슴을 딩하게 울렸다.
예전에 엄마가 지나가는 말로 '독일에 사는 이모할머니네로 유학갈래?' 라고 물어봤을 때, 나는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다는 이유로 단호하게 싫다고 말했었다. (엄마도 진심으로 보낼 생각으로 말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해외에 나가야한다는 사주풀이 한 마디를 들은 이후, 나는 갑자기 외국에 나가고 싶어졌고, 외고에 진학하고 싶다고 선언해버렸다. 늦은 준비였지만 그래도 한 외고의 '독일어과'에 문닫고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에는 중국어 열풍이 영어만큼 불고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 다행히(?) 독일어과가 인기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더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전에 못간 유학의 기회가 생길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어린 마음에 생각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독일어는 내 최애 과목이었고, 그래서 대학에서도 독어독문학을 계속 공부했다. 언젠가 독일에 갈 수 있는 기회를 꿈꾸면서 말이다. 그리고 해외에 나가야한다는 사주를 지키기 위해(?), 부모님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배낭여행, 교환학생 등 해외 경험의 기회를 많이 지원해주셨다. 취업 준비시에는 해외영업 쪽으로 집중적으로 원서를 썼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탈락의 고배를 잔뜩 마신 후에야, 많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는 한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직장에서 해외주재원 발령을 받는 것은 아주 요원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해외에 나가야한다는 의무를 수많은 해외여행으로 소비하고 있었다.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누군가가 남편의 어떤 점을 보고 반했냐고 물을 때면, 나는 (장난삼아) 외모라고 말한다. 하지만 첫 만남에 우리의 과거가 꽤나 닮아있음을 발견하고 놀랐었다. 그도 고등학교 때 독일어를 공부했고, 대학생이 되서도 독일문학을 계속 공부했으며, 언젠가 해외에 나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내 모습과 묘하게 겹쳐보이는 그의 모습에서 어떠한 동질감을 느끼고, 시나브로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결국에는 남편 덕분에 나는 독일에 올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출국하는 날, 인사차 잠시 통화한 외삼촌이 "우리 조카, 드디어 소원성취했네!" 라고 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흘러버렸다. 왜인지도 모르게 오랫동안 운명처럼 바래왔던 독일행. 그렇게 20여년간의 빌드업(?)이 결실을 맺은 순간, 감격의 눈물이었는지, 독일 한번 가기위해 20여년이나 기다려온 지난한 세월들 때문이었는지, 그 눈물의 이유를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요즘 종종 이 모든게 운명이었던 것일까 생각해본다. 사주에 정해진 운명대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사주풀이가 정해준 말에 따라 내 인생을 끼워맞춘 것일까? 이후 틈틈이 내 사주를 검색해보아도, 딱히 해외를 나가서 잘된다는 해석은 별로 보지를 못했다. 그 때 그 사주풀이가 맞기는 했던 걸까? 사주가 하나의 씨앗을 심어놓은 것은 맞지만, 결국 선택을 한 것은 내 자신이었던 것일까? 답은 없다. 사실 답이 중요하지도 않다. 운명적으로 독일에 왔다해도, 운명을 개척하는 것 또한 나의 몫이라면 이 소중한 3년간의 독일생활을 더 의미있게 보내면 되는 것이다.
[썸네일 사진 : 독일 라인강변에서의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