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말. 직장에서 '배우자 해외발령 휴직' 승인이 떨어졌고, 나는 마침내 남편이 있는 독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주재원 와이프'로서의 삶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나의 직장에서는 배우자가 해외주재원으로 발령 받으면,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최대 3년까지 무급으로 쉴 수 있는 제도가 있다. 남편의 독일행이 확정되고, 이 휴직을 찬찬히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소식을 주위에 알리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진짜 축하해~ 너무 부럽다!" 였다.
12년동안 육아휴직이나 안식년 한번 없이, 일년에 최소5일에서 최대15일 정도의 휴가로만 버텨왔던 직장생활이었다. 3년간 온전히 나만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고, 충분히 재충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떠나기 전 환송회에선 많은 친구들과 직장동료들이 나의 리프레쉬와 해외생활을 응원해주었다. 솔직히 결혼식 때 받은 축하보다 더 받았던 것 같다. 참 고마웠지만서도, 마음속으로는 부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손사레를 치고 있었다.
사실 학창시절부터 독일에 살아보는 것은 나의 로망이었다. 그래서 독일로 떠나는게 기대되고 설레기도 하였지만, 마음 한 켠에는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가득했다. 친정가족과 떨어지게 되어서, 낯선 해외 살게 되어서, 독일어를 잘하지 못해서, 인종차별이 두려워서...와 같은 낯선 해외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내가 속한 사회, 내가 가지고 있던 타이틀, 나와 소통하던 사람들과 단절되어, '누구의 와이프'로만 불려지는 세상으로 가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었다.
몇몇 지인들은 우스갯소리로 '주재원 말고, 주재원 와이프가 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직장에 다니지 않고, 가정에만 충실하며 해외생활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장점이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의 와이프로 남는 것이 내 목표이자 꿈은 아니였다. 남편은 내 인생의 동등한 동반자이면서 지지자일 뿐, 나는 남편의 아내로서 종속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늘 독립적인 여성이 되고 싶어했던 나였다. 나는 '나'일 뿐, 남편의 '소속'된 존재로 살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주재원 와이프'라는 단어부터가 나는 늘 불편하고 거부감이 들었다. 이 타이틀은 마치 남편이 존재해야만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 나는 지금 뭐라고 불려야할까? 배우자 해외발령 휴직자? 휴직자? 백수? 가정주부?
주재원 와이프 말고는 내 상황을 직관적으로 표현해줄 단어가 마땅히 없는 것도 문제다. 그럼 왜 주재원 허즈밴드는 없는 것인가? 혹은 주재원 배우자라고 뉴트럴하게 불릴 수는 없는 건가?
앞으로 풀어나갈 이야기들에서는 주재원 와이프로만 불리지 않기 위해, 즉, 휴직하는동안 가정주부로만 머무르지 않고 "나만의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나가는 여정을 담아볼 요량이다. 이미 출국을 준비하면서부터 나는 주재원 와이프의 한계를 경험했다. 비자, 보험, 각종 서류 행정 업무 등 남편이 모두 처리해주어, 나는 몸만 가면 되는 상황이었다. 신경쓸게 전혀 없어서 아주 편하고 좋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남편이 없으면 그 어떤 것도 내게는 보장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우리 부부는 아직 아이가 없기 때문에, 나는 자녀 양육과 교육을 챙겨야하는 다른 주재원 와이프들에 비해서 훨씬 자유롭다. 다시 생각하면, 남편 이외에는 아무도 내 곁에 없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휴직제도 덕분에 경력이 완전히 단절 되지 않고, 복직해도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는 직장이 있지만, 한편으론 겸업금지 조항으로 그 어떤 경제활동을 할 수가 없다. 경제력 또한 남편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양날의 검 같은 상황에서... 정녕 이대로 3년 동안 살림9단 가정주부로만 지낼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썸네일 사진 : 독일 Siebengebir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