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산책하기
영어를 비롯한 어느 외국어든 '가다' 혹은 '걷다' 와 같은 동사들은 초급단계에서 배우는 아주 기초적인 동사이다. 아무래도 인간의 기본적인 행위 중 하나이니만큼, 일상 생활에서 가장 자주 쓰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어로 '걷다'의 의미인 to walk는 이미 한국어와 다양한 용례로도 결합이 되어, 영어를 잘 모르는 사람도 '워킹'이라는 단어는 쉽게 일상에서 사용하기도 한다. 반면에, 독일어에서는 '걷다'라는 단어는 의외로 영어만큼 직관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영어처럼 가다(to go)와 걷다(to walk) 처럼 두 행위를 나타나는 개별적인 동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일어에서는 가다(gehen) 라는 동사에서 파생하여, zu Fuß gehen 이라는 말로 걷다를 표현한다. Fuß가 발(foot) 이라는 뜻이니 직역하면 '발로 가다'라는 뜻이다.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 zu Fuß gehen 이라는 말보다 더 의미있게 배우는 동사는 오히려 따로 있었다. 바로 한국어로는 '산책하다'라는 말로 번역되는 spazieren 이라는 동사이다. 이 단어는 내가 처음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아주 초반에 배운 단어로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에 하나였다. <슈파치어렌>으로 발음되는 소리가 제법 독일어스러워 뭔가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고등학교 시절 중식과 석식을 먹고 30분간의 자유시간동안 교정을 '산책'하는 일이 유일한 자유시간이자 힐링이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의 수많은 추억은 바로 이 산책시간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로부터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지금 독일에 와서 보니 spazieren 이란 단어를 독일 사람들은 정말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한사전에 spazieren을 검색하면 '산책하다'라는 의미가 가장 먼저 나온다. 사실 한국어로 '산책'은 '산보'와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산보는 걸음 보(步)자를 써서 한가롭게 거닐다라는, 걷는 행위에 좀더 초점이 맞춰진 단어라면, 산책의 책(策)은 책, 꾀하다, 생각하다라는 의미의 한자를 쓰기 때문에 거닐면서 '생각한다'에 좀더 초점이 맞춰져있는 단어로 보인다. 하지만 독독사전을 살펴보면 조금은 다른 사실을 알 수 있다.
독독사전에서 설명하는 spazieren 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특정한 목적 없이 여유롭게 가다, 한가롭게 거닐다' 라는 뜻으로 공간, 공간의 이동, 여유 라는 뜻의 라틴어인 Spatium 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제시한다. 하지만 나는 이 사전의 설명에 납득할 수 없었다. 모쪼록 독일에서의 '산책'이라고 하면 걷는 행위 뿐만이 아니라, 걸으면서 '생각하고 사색하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데, 독독사전의 의미대로라면 한국어로는 '산책하다'라는 표현보다는 '산보하다'라는 표현이 좀더 맞는 해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과연 spazieren 은 단순히 여유롭게 걷는 것에 불과한 것일까?
최근 한국의 독서가들 사이에서 스위스의 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이란 책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이 단편을 읽다보면, 산책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사색적인 행위인지를 아주 잘 알 수 있다. "제발 이제 그만 멈춰...!!!" 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을 정도로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생각의 심연까지 들어가게 되며, 그 심연에는 엄청난 상상(혹은 망상)이 곁들여지는데, 산책하면서 "이렇게까지 생각을 한다고??"라며 의아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일독하는 것이 너무 힘겹고 어려웠다. 꼬리의 꼬리를 무는 그의 생각들을 따라가는게 벅찼다. 하지만 산책이 생각하고 글쓰는데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산책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이 꽃 피울수 있는지를 강력히 피력하는 그의 주장과 행동에는 아주 적극적으로 동감할 수 밖에 없었다. 나 또한 독일에 온 이후로 산책을 즐기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사색하는 일이 많아졌고, 그 사색의 결과물로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독일에 오자마자 집을 구하면서 두 가지 옵션 중에서 고민을 했다.
1) 지어진지 오래된 집으로, 난방효율이 떨어져 겨울엔 춥기도 춥고 난방비도 많이 나오는 집이지만, 집에서 라인강이 살짝 보이고, 넓은 공원이 바로 옆에 있는 집
2) 바닥난방까지 되는 신축 아파트이지만 주위에 녹지 등 즐길만한 자연경관은 없는 집
이 두 곳을 두고 결국 우리는 1번집을 선택했다. 한국에서 우리가 언제 한강뷰 아파트에 살아볼 수나 있겠냐고, 독일에서라도 좋은 환경을 누려보자라고 생각하며 추위에 견디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리고 겨울을 두 번 난 지금... 독일의 추위를 견디는 것이 너무 힘들긴 하다.) 그런만큼 우리 부부는 주말마다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고, 나는 남편이 없을 때 혼자라도 나가서 걷거나 조깅을 하는 등 운동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숲세권에 사는 행복은 이런 것인가 싶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이렇게 걸으면 걸을수록 정말 생각이 풍부해진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지루하기는 커녕, 아주 재미있는 일과가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브런치에 연재한 30여편의 글들은 모두 산책을 하면서 영감을 얻은 글들이었다. 가끔 글쓰기가 정말 안풀리는 날이면, 대충 선크림만 바르고 밖에 나가 30분만 걷고와도 어떻게 글을 마무리할지 가닥이 잡히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에서도 분명 드넓은 공원도 많고, 인근 산들의 둘레길 코스도 잘 되어있어서 걸을 일이 전혀 없지 않았는데, 한국에서 걸을 때는 딱히 '사색'을 즐겨본 적이 없었다. 함께 간 일행과 대화를 나누느라 그럴만도 했지만, 주로 걷는데 집중할 뿐, 깊은 생각에 빠져본 경험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국과는 달리 독일에서의 걷기는 사색이 자연스럽게 수반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다를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일단 사람이 엄청 적다. 우리 집 앞 공원은 난지한강공원과 서울숲을 섞어놓은 듯한 공원인데, 넓은 부지에 다양한 자연 식생이 조성되어있어 데이트 코스로도, 가족 바베큐 장소로도 인기가 좋은 곳이다. 날씨 좋은 날에는 사람이 몰리긴 하지만, 워낙 넓으니 붐비거나 정신없다거나 사람에 치인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걷는 것이 가능하다.
서울에도 이런 자연친화적인 공간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울에도 도심, 아파트 단지 속속들이 녹지를 조성하려고 부단히도 노력중인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늘 북적이는 것이 문제다. 주말이면 한강공원에 사람들로 인산인해가 되어, 돗자리 펴는 것, 텐트를 치는 것까지 규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정신 없는 환경에서 내 내면의 소리를 들여다보며, 나는 누구인지, 사회는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깊이 있는 생각을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와 반면에 독일에서는 어떤 날엔 혼자가 무서울 정도로 사람이 없기도 정말 없어, 조용한 공간에 나혼자 걸으며 생각에 깊게 잠기는 체험을 할 수가 있다.
내가 사는 도시 뿐만 아니라 독일 대부분의 도시들은 이렇게 사색하며 걸을 수 있는 자연 공간이 많이 마련되어있다. 그리고 독일 사람들은 이 곳에서 산책을 엄청나게 즐긴다. 이렇게 산책을 즐기니, 독일에서 훌륭한 철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차분한 날씨와 고요한 자연환경 속에서 계속 걷다보면 철학적인 영감이 떠오를 수 밖에 없다. 대학도시로 유명한 하이델베르크의 산책로 이름은 아예 '철학자의 길'인데, 여러 저명한 철학자들이 걸으며 사색했던 길이라 그렇게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친구들과 만나면 외식하고 카페에 가는게 정해진 코스인 한국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친구과의 만남을 산책하며 대화하는 것으로 정하기도 한다. 개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고, 개의 충분한 산책 보장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만큼,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도 정말 많다. 데이트도 마찬가지이다. 그냥 계속 걸으며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이 이들의 데이트 방식이다.
한국처럼 맛있는 곳도, 예쁜 카페도 많지 않고, 외식은 비싸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 노잼 국가답게 친구들과도 크게 유흥을 즐길 거리가 없으니 그냥 걸으며 이야기나 나누는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사실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ㅎㅎ) 독일인들은 왜 산책을 즐기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다. 내가 그렇다. 산책을 많이 해야지! 산책을 하면서 글을 써야지! 라고 결심하고 다짐한 것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집 근처에 공원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운동삼아 더 걷게 되었고, 걷다 보니 그냥 자연스럽게 생각이 많아졌다. 그리고 이 생각들을 정리하려면 글을 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다시 앞으로 돌아가, spazieren 이란 동사의 뜻에 대해서 다시 이해해보려고 한다. 독일인들에게는 걸으면서 생각하고 사색하는 일이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에 사전적 의미에 '생각하다'의 뜻을 추가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대신,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독일인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색'을 포함해서 산보하다가 아닌 산'책'하다라는 뜻으로 번역한 것이 아닐까?
드디어 독일에도 봄이 찾아와 산책하기 아주 좋은 날씨가 되었다. 나는 요즘 부쩍 심해진 허리통증으로 인해 더 열심히 (신전자세를 하고) 걷고 있다. 사실 기획했던 것보다 노잼 독일에서 재미 찾는 것이 쉽지 않아, 매번 다음 편 연재 주제 선정에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고백해본다. 그래서 또 걸었다. 걷다보니 왜 독일와서 가장 내가 즐기고 있는 '산책'이라는 주제를 초반에 생각하지 못했나 아차 싶었다. 아마 독일에 살고 계시는 많은 한국인분들은 나처럼 자연스럽게 산책을 즐기는 일이 많지 않을까 싶다. 혹시 독일 여행을 계획 중인 분들도, 바쁜 관광 일정 중 하루 쯤은 산책을 즐기는 일정을 추가해보는 것을 추천 드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