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카니발 체험기
고등학생 시절 만우절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는 날' 혹은 '가벼운 장난을 치는 날'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모범생들로 가득한 여고 교정에서 '규칙을 조금 어겨도', '선생님의 말씀을 잘 안 들어도' 용납되는 단 하루뿐인 날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범 여고생들의 장난은 장난보다 이벤트에 가까웠다. 수업시간에 전부 뒤돌아 앉아있기도 했고, 갑자기 목이 너무 아프다고 하다가, 목 아이솔레이션을 추며 춤판(?)을 시작하기도 했다. 한 번은 날씨가 너무 좋아 야외수업을 하자며 선생님을 조르기도 했는데, 이 장난은 아주 큰 문제가 되어 교감선생님에게까지 된통 혼나, 반 아이들의 기가 죽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업을 안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봄날의 따뜻한 햇살 아래 푸른 잔디밭에서 수업을 하겠다는 학생들의 귀여운 의지였는데 왜 이렇게 호되게 혼냈었나 싶기도 하다. 어쨋든 만우절의 추억은 수능만을 바라보던 고된 학창시절에 소소하고도,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즐거움이었다.
규칙 앞에서 융통성을 잘 발휘하지 않으며, 음주가무 같은 재미도 일상적으로 잘 즐기지 않는 독일 사람들에게도 이런 만우절 같은 날이 있다. 바로 "카니발" 이다. 물론 독일의 카니발은 전국적인 명절이나 행사는 아니다. 독일 서쪽 특히 라인강 유역의 쾰른, 뒤셀도르프, 본, 마인츠 일대의 지역에서 열리는 축제로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명절 중 하나이다. 크리스마스가 끝나자마자 각종 상점에서는 카니발 관련 물품들을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점점 카니발 기간이 다가옴에 따라 다들 어떤 코스튬을 입을지, 어느 지역으로 원정(?)을 나갈지 속속들이 계획하기 시작했다.
요즘의 카니발은 문화축제의 성격이 강하다. 퍼레이드에 직접 참가하여 공연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길거리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광대, 동물 코스튬을 입고 흥을 즐기며, 어린아이들은 퍼레이드에서 쉴새없이 나눠주는(사실 던져주는) 군것질 거리를 기다린다. 이런 흥겨운 축제 분위기와 달리, 사실 카니발의 시작은 아주 종교적이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단식을 하며 기도한 기간에 맞춰, 중세 시절의 신자들은 이를 기리며 같이 금육, 금식에 참여해야했었다. 그래서 이 기간이 시작되기전, 미리 술과 고기를 마음껏 즐기고, 조금은 방탕하게 지내보자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고기와 술에 가득 취한 민중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그래서 카니발에는 코스튬을 입지 않아도, 얼굴이나 코를 빨갛게 술취한 사람처럼 색칠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이런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독일 지역에서 비교적 가톨릭의 권위가 강했던 서쪽 라인강 유역에서 카니발이 특히 발달하게 되었다. 그런데 종교적 금식 기간 전 방탕하게 먹고 마신다는 의미도 있지만, 카니발에는 또다른 의미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정상 규범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거스르는 것', '평소에 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카니발의 시작을 알리는 "Weiberfastnacht(바이버파스트나흐트, 여성들의 카니발이란 뜻으로 재의 수요일 전 목요일)" 가 더욱 의미있게 느껴진다. 과거 여성들에게는 참정권이나 시(市)의 행정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카니발의 시작일. 이날 단 하루만은 예외였다. 당시 여성들은 그들의 일거리였던 빨래하기를 멈추고, 시청을 점령하였고, 이에 단 하루 여성들에게 남성과 동등한 자격이 주어질 수 있었다. 오늘 날에는 시청 열쇠 전달과 함께, 남성의 넥타이를 싹둑 잘라버리는 퍼포먼스로 오래된 여성 운동의 역사를 함께 기억하기도 한다. 이처럼 기존 규범에 반항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것 또한 카니발 정신의 핵심이다. 그래서 규모가 큰 대도시의 퍼레이드에는 현재 정치 상황을 풍자하며, 분쟁을 멈추고 세계평화를 촉구하는 행렬이 이어지기도 한다.
여러 철학적인 의미들이 내포되어있는 카니발이지만, 사실 많은 독일인들은 이를 깊게 생각하지 않은 채 카니발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성인들은 이 날 하루는 마음껏 음주가무를 즐기고, 어린이들은 달달한 군것질 거리를 잔뜩 먹는다. 음주가무야 내가 워낙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사실 원래의 나였다면 적극적으로 카니발 행사에 참여했을 것 같다. 하지만 카니발은 혼자서는 즐길 수 없는 행사이다. 여러 지인들끼리 함께 모여 분장도 하고,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해야하는데, 안타깝게도 내 주위에는 이를 함께 즐겨줄 사람이 없었다. 이럴 때는 한국의 친구들이 그립기도 하고, 나의 신분은 이 곳에서 영원한 이방인일 수 밖에 없겠구나 느껴지며 조금 쓸쓸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집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분위기라도 느껴보려, 카니발 행사의 정점인 "Rosenmontag(로젠몬탁, 재의 수요일 전 월요일)"의 퍼레이드를 보러 시내로 나갔다. 시내로 나가는 버스 안에는 남녀노소 국적인종을 불문하고, 코에 빨간 색칠을 하고, 여러 동물 코스튬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미 퍼레이드는 시작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카멜레(Kamelle, 단 것, 군것질거리라는 뜻)'를 외치고 있었다. 카니발 행렬에서 수많은 군것질거리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단 것을 먹어봤자 건강에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던 차라, 떨어지는 수많은 사탕과 젤리들을 잡을 생각을 하진 않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분위기에 휩쓸려 장바구니를 꺼내, 젤리를 가득 쓸어담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행렬이 지나갈 때 마다, 주위 사람들과 함께 '카멜레'를 외치며, 군것질 거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음악소리에 맞춰, 둠칫둠칫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렇게 나도 자연스럽게 카니발 행진과 군중에 조금은 녹아들게 되었다.
사실 이 지역의 모든 독일인들이 이 축제를 즐기는 것은 아니다. 카니발 이후 거리에 남겨진 수많은 컨페티 잔여물들과 쓰레기들로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있고, 수없이 뿌려지는 달달구리들이 건강에 좋지 않을 뿐더러, 거대 제과 업계들을 배불려주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남편은 요즘 독일 치안 상황이 좋지 않으니, 사람이 모인 곳에는 가급적 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도 하였다. 다행히 내가 사는 곳에서는 별 사고 없이, 아주 안전하고 질서 있게 행사가 마무리 되었지만, 한 도시에서는 카니발 군중을 향한 자동차 테러가 발생하는 안타까운 일이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니발을 즐기려고 하는 것 같다. 딱딱하고, 재미없고, 차가운 독일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 다같이 흥겹게, 하루 쯤은 삐뚤어져도 되는 날이라고, 그래서 이 기간에는 한 번쯤은 '바보 같고', '비규범적'인 행동을 해도 되는 날이라고, 그래서 그 속에서의 은근한 해방의 재미를 맛보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