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클래식 공연 감상하기
단언컨데, 내가 제일 즐겨듣는 음악은 K-Pop 이다. 사실 케이팝 중에서도 SM 아이돌의 음악만 듣는다. (맞다, 나는 2n년간 SM 아이돌만 덕질해온 핑크블러드 출신이다.) 독일어 공부를 위해 독일어로 된 가요를 듣고 싶어도, 영 들을 만한 것이 없다. 역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잘 발달하지 않은 독일 답다. 영어공부는 팝송 가사, 미드/영드 등을 이용해서 즐기면서 공부할만한 콘텐츠가 많은 반면에, 노잼 독일에선 이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에 우스갯소리로 뉴스가 제일 재미있는 공부 콘텐츠라는 말이 돌기도 한다. (전혀 안 웃기다.) 그래도 한번은 독일에서 아주 유명하다는 가수들의 노래를 들어보자 싶었는데, 워낙 케이팝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영 내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어째저째 독일의 대중가요를 들어보려는 노력은 아예 포기해버렸다. 대신에 오히려 의식적으로 많이 들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있다. 바로 클래식 음악이다.
클래식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그것도 악성(樂聖)으로 추앙받는 베토벤이 태어난 이 나라에서, 클래식을 제대로 즐기지 않는다는 것은 왠지 직무유기처럼 느껴진다. 물론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클래식을 아주 좋아한다던지, 아주 잘 안다던지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워낙 클래식의 세계는 깊고 방대하기 때문에, 그냥 아주 가끔 찾아 듣는 내가, 그냥 어렸을 적 피아노로 쳤던 곡들과 그 작곡가의 곡들 정도만 기억하는 내가, 그냥 스타 연주자들의 연주가 궁금한 내가, 과연 클래식을 잘 알고, 즐겨 듣는다고 말할 수준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한국에서 클래식 공연을 일부러 찾아듣기 위해, 연주회 티켓을 직접 예매하거나 그런 일 또한 극히 드물었었다. 하지만 독일에 와서는, 클래식의 본고장에서는 클래식 연주를 자주 들어야한다는 '이상한 의무감'에 콘서트 티켓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처음으로 감상하게 된 클래식 공연은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공연이었다. 내가 유일하게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피아노이니만큼, 다른 클래식에 비해 피아노와 스타 피아니스트들에게는 조금 더 관심이 있었고, 특히 조성진의 연주를 특히 좋아하고 있다. 그가 한국에서 자주 공연을 하지 않는 만큼, 한국에서의 티켓 경쟁 또한 피 튀겨, 실제로 연주회를 가본 경험은 없었다. (아이돌 콘서트를 방불케하는 피켓팅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조금 사정이 나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독일의 정말 많은 도시로 투어를 다녔으며, 아주 앞자리를 좌석들을 제외하고는 늦게라도 표를 구할 수 있었다.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티켓 구하기가 용이한 만큼, 그의 연주를 들으러 온 관객 중 대부분은 젊은 한국인들이었다. 나 또한 집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라 이동의 수고로움은 있었지만, 이가 무색할만큼, 그의 연주는 아주 아름답고, 가슴이 벅차올라 깊게 여운이 남았다.
조성진 공연 감상 이후, 실황 공연의 감동과 음악의 풍부함을 느껴버렸고, 앞으로 독일에서 기회가 되는 대로 자주 클래식 공연을 보러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이후 내가 사는 도시의 콘서트 홀에서 열리는 공연을 예매하였다. '이자벨 파우스트'라는 독일의 대표 바이올리니스트와 밤베르크 오케스트라의 협연이었다. 연주자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그녀의 파워풀하고 깔끔한 연주가 멋있었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연주의 실력을 떠나서 음악을 더 편안하게, 집중해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녀의 의상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깨가 부각되거나, 상체가 노출되는 의상을 일체 입지 않는다고 한다. 경기력과 상관없는 짧은 치마를 입게하여, 시각적인 (마케팅) 효과까지 노리는 여자 골프선수들처럼, 연주력과 상관 없는 과한 노출의 의상을 경계한다는 의미라고. 사실 나는 튜브탑 드레스를 입은 여성 연주자들을 볼 때마다, 드레스의 아름다움보다는, 격한 연주로 옷이 흘러내리면 어떻게하지 라고 걱정할 때가 많았다. 또, 종종 유튜브로 보는 연주 영상에서는 어깨 위로만 카메라가 클로즈업하여, 마치 다 벗고(?) 연주하는 듯한 연출이 보여질 때, 조금은 불편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자벨 파우스트의 연주를 들으면서는 그런 잡생각들이 아주 싹 사라졌고, 그래서 더 연주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노출이 없어도 그녀의 연주복은 정말로 멋있었다.
연주자가 연주복에까지도 의미를 담는 것처럼, 클래식 공연을 보러가는 날은 내게도 복장이 큰 의미가 있었다. 바로 독일에서 몇 안되는 "꾸밀 수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노잼만큼이나 패션테러리스트로도 유명한 독일에서 나는 내 기준으로 under-dressed 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친구들과 만날 때는 "꾸밈 정도"를 미리 합의하고 만나야한다는 요즘 세대의 밈처럼, 독일에서 친구들과 꾸밈정도를 맞추려면, 자전거를 타기 편한 바지, 보온과 방수 기능이 잘되는 패딩, 편안한 운동화 혹은 장화가 기본이다. 한국에서 그리 화려하게 입지 않는 편이었는데도 그대로 입고 어학원에 가면, 늘 '오늘 무슨 날이냐'는 소리를 들었던 터였다. 하지만 클래식 공연을 보러가는 날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원피스도 입고, 화장도 했다. 꼭 그래야한다는 것이 의무는 아니지만, 독일사람들 대체로 클래식 공연장에는 격식있게 차려입고 왔다. 특히 나이드신 분들일수록 더 그랬다. 이에 편승해서 나도 새삼 오랜만에 원피스를 꺼내입고, 공연 시작 전 샴페인 한 잔을 주문해서 마시니, 오랜만에 인스타에 올릴만한 사진을 하나 건질 수 있었다. (ㅎㅎ..)
물론 모든 공연이 격식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확실히 젊은 세대들도 클래식을 즐기기 시작하고, 피켓팅과 같은 인기몰이의 중심에 있는 반면, 독일에서는 대부분 노년층이 클래식 공연의 관객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다녀온 캔들라이트 크로스오버 공연은 좀더 젊은 감성으로 클래식 악기를 즐길 수 있는 공연이었다. 현악 4중주로 여러 대중 음악을 연주하는 캔들라이트 콘서트는, 젊은층들이 타겟 고객이니만큼 인스타에 엄청난 바이럴 광고를 돌리고 있어, 자주 광고로 접했었다. 나는 감사하게도 한 블로그 이웃님의 초대를 받아 관람할 수 있었는데, 이 날은 독일의 국민가수라는 '헬레네 피셔'의 곡을 현악 4중주로 재해석한 연주였다.
공연에 가기에 앞서 그녀의 곡을 들어보았다. 그녀는 독일 공영방송사의 연말 카운트다운 공연에 항상 초대되며, 그녀를 모르는 독일 사람이 없다고 한다. 곡들은 신나긴 했지만, 완전 내 스타일까지는 아니었다. 무언가 우리나라의 소찬휘나 장윤정 그 사이 쯤에 있는 느낌이 났다. 하지만 클래식 악기로 재해석된 헬레네 피셔의 곡들은 내 기준에서 원곡보다 더 좋았고, 너무 신난 나머지, 손가락과 발가락으로 아주 신나게 내적 댄스를 추기까지 했다. 내가 너무 유난인가 싶었는데, 주위의 다른 독일인들도 역시나 손가락과 발가락으로 조용한 흥을 분출하고 있었다. 꼭, 격식을 차리지 않더라도 이렇게 소소하면서도 즐거운 공연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현악 4중주의 연주자 중 3명이 전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많은 연주 회차 중 랜덤하게 팀이 배정된다고 하는데, 이 날 대부분 한국인 연주자로 구성되어있단 사실이 우연이었지만서도, 그래서 더 자랑스러웠다. 클래식의 본고장에서 당당하게 인정받아 활동하고 있는 고국의 연주자들을 보고 있으니, 더 박수를 크게 칠 수 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클래식, 공연문화가 얼마나 더 발전하고 있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독일에서 클래식 음악 감상하는 것은, 독일에서만 즐길 수 있는 '특권 같은 재미'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단지, 내가 한국에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 이미 한국에서도 수많은 공연들이 열리고 있으며, 많은 글로벌 스타들 또한 (짧게나마라도) 내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나의 관심 부족이었겠지, 한국에서도 충분히 클래식의 재미를 느낄 만한 인프라는 조성되어있고,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렇게라도 클래식 공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 만으로도, 독일생활에서의 소소한 재미로 느껴진다.
그래서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콘서트 티켓을 구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독일에서 듣는 것이다. (^^) 그의 홈페이지에 가면 1년간의 해외 투어 스케쥴이 상세하게 나와있고, 예매도 미리 할 수 있다. 나 또한 다가올 봄에 예정되어있는 라벨 리사이틀의 좋은 자리를 예매 완료하였다. 혹시나 독일 여행이나,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여행하는 김에 한 번 괜시리 의무감에라도 클래식 공연을 감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감사하게도, 지난 주 브런치로부터 "스토리 분야 크리에이터"로 선정되었다는 쪽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 프로필에 자그마한 뱃지도 하나 생겼더라구요. 사실 구독자 100명 달성 이후, 노잼 시리즈를 연재하기 시작한 이후, 반응이 전보다 미온적인 것 같아서 조금 동력을 상실했었는데요, 이렇게 크리에이터 선정이 되고나니, 다시금 열심히 글을 써봐야겠다는 동기부여가 제대로 되었네요. 제 글에 늘 성원해주시고, 관심 보여주시는 독자님들 덕분입니다. 감사드리며, 언제나 댓글과 좋아요는 환영입니다. 늘 편안하고 즐거운 나날 되시기를 바랄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