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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일의 썸머' 같을 줄 알았죠

독일 가라오케 방문기 

by 럭키젤리 Feb 1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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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한국의 '노래방' 문화는 한국의 주요 놀이 문화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한테만 그런 아주 주관적인 생각이다. 학생 때부터 '놀러간다 = 노래방간다' 는 사실상 동의어나 다름이 없었다. 지금처럼 다양한 놀거리나 볼거리가 없던 시절이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모임의 뒷풀이 자리, 회사에서의 회식 자리의 마지막은 노래방이 장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회식 자리에서의 노래방 경험 마저 유쾌했던 것은 아니다. 미디어에서 유흥주점으로 묘사되는 노래방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해 소비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노래방 문화는 지금의 케이팝 문화의 발전을 이끄는데 아주 중요한 토대였다고 감히 이야기 해본다.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즐겨 부르는 사람이 많으니, 당연히 잘 부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고, 잘 부르는 사람이 많으니 당연히 가수를 꿈꾸는 이들이 많지 않겠는가. 슈퍼스타K를 필두로 쏟아졌던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만 봐도, 얼마나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이 많은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이같은 현상에는 학생들 사이에서 건전하게 뿌리내린 노래방의 영향도 있지 않을까?



영화 "500일의 썸머" 중 가라오케를 즐기는 주인공들



한국의 노래방은 참 프라이빗하다. 본인의 일행끼리만 작은 방 안에서의 시간을 즐긴다. 안에서는 최신 곡을 부르든, 옛날 노래를 부르든 상관이 없다. 고음불가 음치가 되어도, 막춤을 추어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난 나름의 해방감을 즐길 수 있다. 그 자유와 추억은 1평도 안되는 것 같은 작은 방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이런 노래방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준 것은 영화 "500일의 썸머"였다. 영화에서 보여준 서양식의 가라오케는 한국 동아시아의 가라오케와 완전히 달랐다.  안에 무대가 있었고, 그 무대 위에서 내가 신청한 노래를 부르는 방식이었다. 나와 일행들만의 은밀한 노래 부르기가 아닌, 바 안에 모든 사람들을 나의 관객으로 만드는 노래 부르기였다. 그리고 당시 20대 초반의 높은 관종력을 보유하던 내게서양식 가라오케는 남달라보였다. 노래를 잘 부르지는 않지만, 무대에 올라 나대는 것을 좋아했기에 이러한 서양식 가라오케를 꼭 체험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무대를 한 껏 즐기는 서로의 모습에 주인공들이 사랑에 더 빠져들었다. 서양식 가라오케에서는 나도 무대를 즐기다가 운명의 남자와 눈이 맞을 수 있지 않을까? 같은 망상까지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의외로 서양식 가라오케를 가볼 기회는 없었고, 너무나 당연히도 운명의 남자를 만나는 그런 영화 같은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의외로 맥주의 나라 독일보다 다른 나라 맥주가 더 맛있을 때가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서양식 가라오케 체험은 아주 뜬금없이 한 독일의 어느 아이리시 펍에서 하게 되었다. 독일에 오고 나서 친구와 처음으로 나이트아웃을 하는 날이었다. 늦은 저녁에 맥주 한 잔 하기로 하고 구 도심을 거닐다가, 발길 닿는대로 한 아이리시 펍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냥 여느 아이리시 펍과는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스탠딩으로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테이블에 자리잡고 마시기도 하며, 불금을 즐기는 시끌시끌한 분위기였다. 근데 그러다 한 남자가 있는지도 몰랐던 무대 앞으로 나왔다. 갑자기 스크린이 천장에서 내려왔다. 음악이 흐르며 가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가라오케가 시작된 것이다. 



가라오케를 즐기는 독일인들


흘러나오는 리듬에 따라 나도 함께 어깨를 들썩였다. 친구는 나에게 한 번 불러보라며 권유하였지만, 거절했다. 예전부터 체험해보고 싶었던 서양식 가라오케였는데,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 곳에 있는 독일인들이 다같이 따라부르며 춤출만한 노래를 선곡하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최신 유행 팝이나 K팝만 듣는 나와, 독일인들이 듣는 음악은 상당히 괴리감이 있어보였다. 오아시스의 원더월 말고는 솔직히 거의 다 모르는 노래들이었다. 직접 무대 위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진 않았지만, 대신 노래를 부르고, 호응하는 독일인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펍 안의 사람들은 생각보다 연령대가 있어보였다. 단체 여행객 뱃지를 달고 있는 어르신들의 테이블도 있었고, 마치 회식을 하는 듯한 양복 입은 직장인들도 보였다. 그저 독일인스러운 패션의 내 나이 또래의 남성들도 있었다. 20대 초중반은 거의 없어보였고, 그래서 그런지 선곡하는 노래에서도 연식이 느껴졌다. 사실 독일 대중음악, 특히 팝음악은 엔터테인먼트 불모지인 독일에서 핵노잼을 담당하는 대표 분야이기 때문에, 애초에 노래를 기대하지 않았기도 했다. 가장 많은 관객들이 환호했던 노래는 BAP이라는 밴드의 Verdamp lang her 라는 곡이었다. 스크린에 뜬 가사가 전혀 독일어 같지 않아 무슨 노래인가 싶었는데, 쾰른 지방의 사투리인 쾰쉬(Kölsch)로만 노래를 만드는 밴드의 노래였다. 마치 경상도 출신 밴드가 경상도 사투리로 만든 노래를 떼창하는 광경이라니, 너무나도 이색적이었다. 


직접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지만, 독일에서의 첫 가라오케, 아니 첫 서양식 가라오케 체험을 무사히 잘 즐겼다. 평소에 흥이라는 것이 없어보이는 독일인들이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광경은 생경했다. 물론 이 곳에서 "500일의 썸머" 같은 로맨틱함이라던지, 영화 같다던지 그런 순간들은 당연히 없었다. 이들의 흥이 절정에 달할 수록, 노래 실력은 솔직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저 고래고래 노래를 지르는 사람에게서 고막테러를 당하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어떤 여성은 당최 마이크를 놓지 않고 독점하기도 했다. 술에 취한 모르는 사람이 끊임없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맨정신으로 듣는 것 만큼 고역인 일이 있을까. 차라리 나 또한 그들과 같은 무드에 젖어 취해 있지 않는 이상, 그냥 계속 관람하는 일은 그리 낭만적이진 않았다. 


단체 관광객 중 하나였던 그녀가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s 를 부르자 떼창이 시작되었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다. 개인적 가치가 더 중요한 서양에서는 여러 모르는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문화이고, 공동체적인 가치가 더 중요하고, 남에게 관심 많은 한국에서는 방 안에서 폐쇄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문화인게. 오히려 상반되어야할 것 같은데 말이다. 오히려 본인이 어떤 노래를 어떻게 부르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그럴까 생각도 해보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나는 완벽히 이 독일인들 사이에서 완전히 동화되어, 이들과 같은 농도로 가라오케 문화를 즐길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 곳에서 나는 유난히도 철저한 이방인 그 자체였다. 


첫째로, 독일인들만이 오랜 시간에 걸쳐 공유하고 있는 노래의 데이터 베이스를 나는 알지 못했다. 마치 나는 윤수일의 아파트와 로제의 아파트 둘다 잘 알고 있지만, 외국인들은 로제의 아파트만 알고있는 상황으로 비유해볼 수 있을까나. 심지어 독일에는 로제의 아파트 같이 바이럴 되는 최신 노래조차도 없다. (독일 팝음악은 정말이지 노잼이다.) 또, 나의 무대에 호응해줄만한 관객이 없었다. 고성방가 노래에도 호응을 해주는 것은 서로 일행이기에 가능한 부분이었다. 독일인도 아닌 작은 동아시아의 여성이 부르는 노래에 과연 얼마나 많은 독일인들이 자발적으로 호응해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학원에서 몇몇 친구들이 다같이 가라오케에 가자고 제안했던 적이 있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못갔던 적이 있었다. 아마 나에게 많은 일행들이 있고, 조금은 젊은 분위기의 가라오케였다면 조금은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 서양식 가라오케 체험이 재미있으면서도, 재미있지가 않았다. 여전히 나는 나의 친구들과 즐기는 한국식 노래방이 더 재미있고, 그들과 함께 놀던 기억들이 그립다. 최근에 베를린이나 프랑크푸르트 같은 대도시에는 한국식 코인노래방이 생기는 추세라고 한다. 이렇게도 한류가 퍼져나가는 것이 반갑기만 하다. 케이팝의 인기와 함께 노잼 독일에도 한국식 노래방 문화가 널리 퍼져, 이들이 새로운 재미를 좀 알아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결국 독일 가라오케 체험에는 대유잼 점수를 후하게는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용하고, 적막한 일상에 조금의 소란스러운 에너지를 주는 경험이었다. 혹시나 독일에서 서양식 가라오케를 즐기고 싶은 분들을 위해 팁을 드리고 싶다. 수많은 서양인 앞이라도 긴장하지 않는 무대체질일 것, 선곡은 되도록 90년, 2000년대 팝송이나 브릿팝으로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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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네덜란드 하이네켄 박물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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