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각자의 반짝임으로 빛날 뿐이다.
학벌주의에 대한 반론
“야 우린 가방끈이 짧진 않아, 끈 재질이 레자라 그렇지.”
그 웃픈 이야기에 아릿한 통증을 느끼며 한참을 웃어젖혔다.
대학 진학률은 80%에 육박하는 이 이상한 나라에서 공부를 못하는 이들은 죄인이다. 대학 서열화를 넘어 고등학교 때부터 학생들에겐 바코드가 주어진다.
최상품, 하자품... 학습 능력은 오만가지 능력 중 하나일 뿐인데 오로지 그 하나에 우린 목을 걸고 달려야 한다. 마치 경마장의 말들처럼.
우리가 가진 오만가지 재능은 잡기 취급을 받기 일쑤다. 나 역시 그랬다. 학습 능력이 뛰어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공부에 열의를 가진 부모님이 계셨던 것도 아니다.
그냥저냥 적당히. 항상 적당히 하는 아이였다. 평균, 3등급. 하자도 최상품도 아닌 물건으로 치자면 대형마트 납품용쯤 됐을까.
그런 내게도 반짝임은 있었다. 열의를 갖고 있었고, 수년간 쌓인 독서량으로 독해력이 좋았고 나름의 문장력이 있었고, 말하는 걸 참 좋아했다.
나는 수시 혹은 정시로 대학 가기엔 적절하지 않은 아이였다. 그때쯤 도입된 ‘입학사정관제’.
온갖 토론 대회에 참가했고 매번 수상했다. 내게 날개를 달아 줄줄 알았던 그 상장들은 그저 허울이었다. 나와 같은 제도 나와 같은 명문대에 입시원서를 냈던 친구가 갖고 있던 건 1등급에 학업 우수상과 반장 임명장뿐이었다.
자신 있었다. 내 상장엔 국회의장과 장관 시장의 이름이 박혀있었으니까. 그런데, 난 떨어졌고 그 친구는 합격했다. 그때 알았다. 반짝임도 공부를 잘할 때 부가적으로 빛날 수 있다는 걸.
나름의 꿈으로 지방에 있는 언론학과에 입학했고 나름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 자부한다. 그런 내가 사회에서 맞닥뜨렸던 건 학벌의 중요성이었다.
이력서에는 대학과 소재지가 어딘지까지 기술하라 말했다. 모든 걸 솔직히 실토한 나는 탈락의 연속이었다.
사실 사회 새내기가 뭐 얼마나 특출 날 수 있겠는가. 고만고만한 아이 중 명문대생을 택하는 건 당연한 이치겠지.
어찌어찌 입사를 했지만, 그 안에서도 내 대학 간판은 내 이름만큼이나 날 따라다녔다. 조금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누군가 해결을 해야 할 때 지방대인 나는 제쳐졌다. 내게 왔던 일도 “김 기자가 좋은 대학 나왔지~ 그럼 김 기자가 해.”
그런 허망함에 친구에게 토로했던 “내가 가방끈이 짧다고 회사가 업신여겨!”라는 불만에 그녀는 해학으로 답했다.
“학사가 짧은 건 아니지. 가죽이 송아지 가죽이냐, 레자냐의 차이야.”
그런데, 약 3년간 오만 사람을 보고 오만 학교 출신들을 만나며 느낀 건 가진 게 정말 다르다는 거다.
단편적으로 내 연인은 명문고, 명문대를 나왔지만, 그는 내가 가진 말하는 능력이나, 순발력, 재치, 글쓰기 능력을 부러워한다.
반면 그의 학습 능력은 정말 감탄과 감탄을 자아낸다. 경찰대 가려고 얼마나 공부했냐는 질문에 “응? 그냥 했어. 8시간은 꼭 잤어. 사실 공부도 재능이라 생각해. 네 말하기 능력처럼.”라고 답했다.
또 내 지인 중 한 명은 학습 능력은 제로에 가까우나 항상 밝은 기운과 미소로 좋은 사람들과 은인들을 몰고 다닌다.
또 다른 이는 저 세상의 감각으로 글을 쓰는 족족 사람의 마음을 건든다.
우린 그저 가진 게 다를 뿐이다. 갖지 못한 것으로 아파하거나, 갖지 못한 것으로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의 반짝임을 당신이 먼저 알아봐 주고 빛을 비춰야 할 뿐이다.
당신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 그 자체로 반짝인다.
오늘도 반짝이는 당신을 응원하며, 나를 응원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