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고 길게, 그래서 공무원이 괜찮다는 말
첫 1년간 있었던 에피소드를 하나하나 적다 보니, 벌써 12번째 에피소드를 작성하고 있다.
지난 11번째 에피소드까지는 신규 직원으로서 불합리함에 시달리는 이야기들로,
공무원을 꿈꾸거나 준비 중인 수험생들에게는 호러물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시청공무원 931의 생존기]를 쓰기 시작할 즈음엔, 이러한 불합리함에 울분이 가득했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견뎌내다 보면 결국 좋은 날이 온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나도 버텼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는 희망도 함께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에피소드를 되새기며 쓰다 보니 어두운 이야기들만 전하게 된 것 같아,
이번에는 분위기 환기 차원에서 공무원으로서 좋은 점들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혹시 기대하실 분이 있을까봐 미리 말씀드린다.
아직 발령 1년 이내에 있었던 어두운 이야기들은 다 끝난 게 아니다. (…)
“이런 부분은 좋아요”, “괜찮은 것 같아요”라고 말해도, 누군가에겐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질 수 있다.
월 얼마를 버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돈의 효용성이 더 중요하다.
같은 금액이라도 사는 지역에 따라 충분할 수도, 부족할 수도 있다.
각종 복지 혜택도 마찬가지다. 비교하자면 끝이 없고,
‘적당한 선에서 만족한다’고 말하는 나는 ‘정신승리 중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그래도 [1. 연봉과 안정성 / 2. 복지, 연가 / 3. 기타]로 나누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한마디로 가늘고 길게, 오래 간다.
주변에서 공무원을 하고 싶어하는 친구가 있다면,
큰 욕심이 있다면 공무원은 피하라고 말한다.
굳이 꼭 공무원을 해야겠다면, 7급 이상을 도전하라고 권유한다.
이미 다들 알겠지만 공무원 연봉은 짠 편이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회자되던 “한 달에 160만 원 받던 시절”은 이제 옛말이다.
9급 공무원으로 첫 발령받을 경우, 실적도 없고, 급도 호봉도 낮기 때문에
연봉이 낮게 느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9급의 월급과 연봉은 최저임금과 큰 차이가 없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직급과 호봉이 쌓일수록 급격히 상승하는 구조라고 한다. 마치, 누진세 그래프처럼 말이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9급 직원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7~8년 차쯤 되면 생각보다 살만해질 거야.”
보통 이 시기는 7급이고, 호봉도 꽤 쌓였을 때다.
아무리 그래도 공무원 연봉은 어디 가서 자랑할 수준은 아니다.
그래도 월급이 지체 없이 들어오고, 정년이 보장된다는 점은 큰 장점이다.
20대엔 나도 이렇게 생각했다.
‘공무원이 돼서 폐쇄적이고 구시대적인 조직문화를 버텨야 겨우 그 정도 받는 건데, 굳이?’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한 직장을 오래 다니는 사람, 정년까지 다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완벽한 직장은 없지만, 좋은 직장은 많다.
연봉이 높은 직장, 일이 편한 직장, 복지가 좋은 직장 등등.
공무원은 그중에서도 ‘정년이 보장되는’ 직장이다.
코로나 이후 경제 불안정, 건설업 침체, 관세 이슈 등으로 불안한 요즘,
정년이 보장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함을 느껴야 할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지금 퇴직을 앞둔 세대는 연금과 개인저축이 뒷받침되어 있어 노후가 안정적이다.
곧 퇴직하는 한 서기관님은 이렇게 말했다.
“많이 여유롭진 않아도, 남에게 싫은 소리 안 하고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그분은 공무원연금, 공무원공제회, 개인연금을 합쳐 월 500만 원 정도 수령한다고 한다.
하지만 젊은 공무원들은 이제 연금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연금 개혁으로 수령액이 줄었고, 고갈 위험도 있어 앞으로 몇 차례 더 개혁이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젊은 공무원들은 재테크에 관심이 많다.
30대 공무원들은 점심시간마다 주식, 부동산 등 재테크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월급도 적고, 연금도 기대 못하니, 그 이후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말한다.
“겸직 허용해주든지, 급여 현실화라도 해줘야 연금 공백을 메우지 않겠나.”
물론 진심이라기보단 웃자고 하는 말이다.
‘적은 월급으로 결혼은 가능하냐’는 질문도 커뮤니티에서 종종 본다.
30대이자 기혼자인 내 입장에선, ‘맞벌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요즘 맞벌이 가정을 찾기 어렵지 않기에 무리한 전제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무원 월급이 박봉인 건 맞지만, 결혼을 못 할 정도는 아니다.
더군다나 부부가 모두 공무원이라면, 정년까지 일하며 천천히 육아하고 노후 준비도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공무원을 ‘가늘고 길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한때는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의 연봉이 부러웠다. 지금도 부럽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고, 고연봉자 중 일의 강도가 낮은 사람은 극소수다.
적은 연봉이지만, 그만큼 삶을 돌아볼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점을 잘 활용한다면
더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거창하게 ‘복지 혜택’이라고 썼지만,
사실 중견기업이나 대기업에 비하면 공무원의 복지는 턱없이 부족한 편이다.
우리 지자체는 아직 식대가 9천 원이라, 밖에서 한 끼 먹으면 식대로는 해결이 안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휴양시설도 고급 리조트보다는 비교적 저렴한 곳들과 제휴되어 있고, 성과급도 자랑하긴 어렵다.
이렇게 보면 공무원의 복지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공무원은 정부의 복지 정책의 최전선에 있다.
맞벌이 시대에 맞춰 도입되는 여러 정책들을 가장 먼저 적용받고,
문화로 정착시키기 위해 솔선수범하는 역할을 한다.
공무원으로서 이런 선도적 정책들을 눈치 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은 꽤 매력적이다.
출산휴가, 육아휴가는 물론, 남성 직원도 사용할 수 있고,
8세 미만 아동을 육아하는 경우에는 유연근무제를 활용해 하루 2시간 이내의 단축근무도 가능하다.
최근에는 ‘임신검진동행휴가’라는 제도가 도입돼
예비아빠가 2일(총 16시간, 시간 단위로 분할 사용 가능)을 사용할 수 있다.
재직기간이 6년 이상이 되면 21일의 연차를 받을 수 있어 개인 용무를 처리하기에 꽤 수월하다.
공직사회는 폐쇄적이고 고지식하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연차 사용이나 육아휴가 같은 부분에서는 오히려 굉장히 열려 있다.
보고서의 띄어쓰기나 글씨체 같은 사소한 것엔 집착하던 상사조차
연차는 이유 묻지 않고 “그래, 다녀와~”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까다롭게 구는 상사도 있긴 하지만,
‘같은 공무원이니 이용할 건 이용하자’는 문화가 기저에 깔려 있다.
출산과 육아로 인한 휴직도 마찬가지다.
부부가 번갈아 휴직하며 아이를 돌보고, 어린이집에 보내며 맞벌이로 복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시간 단축근무로 아이를 등·하원시킬 수 있어 육아 부담도 확실히 줄어든다.
복지포인트나 크진 않지만 자잘한 혜택들도 많다.
지자체마다 다르겠지만, 가족 친목을 장려하는 정책도 있다.
우리 지자체는 1년에 한 번, 연차를 하루 이상 쓰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
최대 40만 원까지 지원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다.
지원금도 좋지만, 무엇보다 연차를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공무원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키워드 중 하나가 ‘정년 보장’이다.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이를 두고
“나도 안 잘리는데, 저 xx도 안 잘려!”라는 유머가 돌기도 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 xx’와 계속 함께 일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정년 보장’ 외에도 ‘순환전보’라는 제도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지옥 같아도 군 복무 기간(?) 정도만 버티면 새로운 평화가 찾아온다.
운이 좋으면 6개월, 1년 만에 서로 갈라지기도 한다.
인사 발령 시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사람들과 일하게 되거나, 내가 다른 부서로 이동하게 되기도 한다.
민간 기업에서는 부서를 옮기기보다는 이직을 택한다. 그만큼 내부 이동이 어렵기 때문이다.
공무원은 순환 전보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런 고민이 적은 편이다.
물론 단점도 있다.
시·군 행정은 워낙 다양해서, 이전 부서에서 쌓은 지식이 새 부서에선 전혀 도움이 안 될 때도 많다.
인수인계는 거의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진행되기 때문에, 운이 좋아야 온전히 제대로 인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문화는 누군가에겐 이게 휴직을 고려할 만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에겐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한 줄기 희망이었다.
혹시 공무원을 희망하지만,
‘공무원이 된 후 너무 힘들면 어쩌지?’ 걱정하는 분이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일단 버텨봐. 내가 전출 가거나, 힘들게 하는 사람이 전출 갈 때까지.
그래도 안 되겠다면, 그땐 주저하지 말고 휴직을 써.”
나의 어릴 적 꿈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눈에 띄는 걸 싫어했던 나는,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평범한 직장, 평범한 가정, 평범한 행복.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 힘들게 살았던 유년기 시절도 소박한 꿈에 영향을 주었다.
‘평범한 남들처럼’ 사는 것 자체가 나에겐 꿈이었다.
하지만 그 평범함조차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어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물론, 남들보다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직 인생을 다 살아본 것도 아니기에, 쉽게 단정짓는 건 경솔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적당히 살아가는 삶’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공무원이란 직업은 꽤 괜찮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적당한 성과, 적당한 성실함, 적당한 만족.
누군가는 공무원을 향해 ‘세금으로 먹고사는 주제에’라며 비난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적당히 받으니, 적당히 일합니다. 그래서 만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