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약속했잖아요.

새끼손가락을 걸지 않아서 무효인가요?

by 구삼일

이번 에피소드는 문화・체육행사에 관해 다뤄 볼 것이다.(이하 체육행사라 칭한다.)

지자체마다 다르겠지만, 우리 지자체는 1년에 2번(상, 하반기) 체육행사를 진행한다.

보통은 부서원 약 10여 명 정도와 함께 '문화행사 또는 체육활동'을 하면서 서로의 친목을 도모하고 격무에 지친 일상을 환기시키곤 한다.

어떤 부서는 영화를 보고 커피를 한잔 하면서 영화에 대한 논의를 하기도 하고, 어떤 부서는 지역 행사에 참여하면서 공무원보다는 시민의 입장에서 하루를 즐기면서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곤 한다고 했다.


물론 우리 기관도 체육행사를 진행한다.

다만 위에 언급된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말이다.

내가 발령받은 그해는 우리 기관이 설립된 지 1년이 조금 넘은 시점이었다.

작년에도 체육행사 정책은 있었지만 신생청으로 모든 것을 무에서 유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체육행사를 진행하긴 어려웠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내가 발령받은 시점이자 기관이 자리 잡기 시작한 상황에서 우리 기관의 체육행사는 나름의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모든 부서가 소통과 화합을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다만 그 행사의 담당자가 9급 신규였을 뿐이다.


기관장, 본부장 그리고 우리와 다른 부서 부서장을 비롯한 모든 직원을 모시고 체육행사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색을 표하는 나를 보며 우리 부장과 팀장은 이야기했다.

"기관장께서 청에서 처음으로 하는 체육행사니깐 다 같이 하자고 하신 거야, 이번만 자네가 고생하게.

다음 체육행사부터는 부서별로 따로 추진하자고 할 테니까 말이야"

그때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나다. 이번만 고생하면 되니 열심히 해보자고 다짐했다.


모든 행사는 계획(안)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한다.

어디를 가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무엇을 먹고 그러면서도 어떤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

단순히 놀러 가는 것처럼 보여선 안되기 때문이다.

본청은 부서별로 체육행사를 진행하기에 규모가 작고 근처에서 진행하기 때문에 계획(안)을 참고하려고 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계획(안)을 한번 작성하면 [팀장 ➡️ 부장 ➡️ 본부장 ➡️기관장]의 검토를 받아야 했다.

부장까지 통과했더라도 본부장 선에서 컷 당하면 새로이 꾸려서 다시 검토를 받았다.

똑같은 아저씨들 같은데, 생각보다 그들의 취향은 다양했다. 누구는 바닷가를 누구는 산을 좋아했으며, 누구는 어떤 음식을 좋아하지만 누구는 그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계획(안)의 ver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지만 그럼에도 계획은 조금씩 검토자들의 타협지점으로 수렴해 갔다.


그렇게 타협된 계획은 다음과 같다.

1. 오전 일찍 버스를 타고 타 지역으로 가서 트래킹

2. 내려와서 점심 식사

3. 이동하여 티타임

4. 적당한 장소에서 레크리에이션

5. 청으로 복귀


아주아주 시간을 꽉꽉 채워서 오후 5시에 청으로 복귀하는 코스였다.

오후 5시에 청에 와서 이것저것 하다 보면 평소의 퇴근과 똑같아지는 계획에 하급자들의 원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상급자들에게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다만 담당자이자 기관의 막내 중의 막내인 나는 상당히 눈치가 보였다.


트래킹 코스의 시간 등을 체크하기 위해 사전답사까지 가면서 완벽한 계획(안)을 만들었다고 자부했던 나지만,

최악의 적은 내부에 있다고 했던가, '트래킹 코스가 맘에 안 든다'며 다른 코스로 가버린 우리 부장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시작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내가 계획(안)을 가지고 수없이 보고 했고 본인이 컨펌했으면서 트래킹 코스를 지맘대로 바꿔버리는 그 심리는 지금도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로 인해 식당 예약 시간을 2번이나 미뤄야 했다.

(다시 말하지만 50명에 가까운 인원이고, 식당에서도 미리 음식을 준비해 놓았는데 2번이나 예약시간을 미루었으니 식당 측에서도 상당한 난색을 표했다.)


레크리에이션은 또 어떠한가, 제비 뽑기로 선물을 주자는 상급자의 의견에

상자에 하급자 수만큼 제비를 만들어 넣고, 선물은 상급자에게 기부받아서 마련했다.(반 구걸했다.)

누구는 텀블러를 누구는 기프트카드를 기부했다. 어떤 이는 재테크를 성공해서 건물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기부하지 않았다. 물론 기부할 의무는 없지만 나로서는 씁쓸함을 느꼈다. 평소에 자랑이나 하지 말지.


모든 코스를 끝내고 녹초가 되어 청에 복귀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후반기에 있을 체육행사는 우리 부서만 가면 될 테니까.

나에게는 그저 해프닝 같은 하루처럼 느껴졌다.

'다음 체육행사는 여느 타 부서처럼 간단한 나들이를 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러했던 나의 바람은 이루어졌을까?

결과부터 말하면 내가 그 기관에 있던 2년.

그리고 4번의 체육대회를 기관 전체로 진행했고, 담당자는 나였다.

중간에 한번 다수결로 정하자는 말은 나왔지만, 변하지 않았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나머지 2 부서 중 한 부서가 주도해서 진행해야 할 텐데 그러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 결과는 뻔했다. 한 번은 본부장이 바뀌면 본부장이 소통해야 하니 당연하듯이 기관 전체로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총 4번의 체육행사 중 3번은 트래킹을 한 번은 등산을 갔고. 그중에는 장기자랑을 진행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매번 늦게 돌아왔다.


과연 누구를 위한 체육행사였을까. 하급자는 다 질색하지만 몇 명만이 행복한 체육행사.

부장, 팀장과의 약속, 부서끼리의 신뢰 그 무엇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저 시켜 먹기 편한 구삼일이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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