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새록새록, 주먹은 불끈불끈
발령을 받은지 몇년이나 지난 지금의 나는 당연하게도 몇년 전의 일을 어제처럼 또렷히 기억할 순 없다.
그럼에도 지금까지의 에피소드를 작성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에 불합리한 지시가 있을 때마다 작성해왔던 고발목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발목록'
이것은 내가 발령받은지 며칠이 지나지 않았을 때 '카풀 강요'사건으로 적기 시작하여
그 팀장님이 다른 곳으로 전보 이동할 때까지 작성되었다.
오늘은 그 고발목록에 있으나, 하나의 에피소드로 글을 쓰기에는 애매한 몇가지를
하나의 에피소드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존의 큼지막한 사건의 사이사이에 있는 사건들이니,
이번 에피소드만큼은 기존에 작성된 12편의 에피소드와는 연결되지 않는 '외전'이라고 보면 되겠다.
시간대는 모두 발령 1년 내의 기간 동안의 에피소드이다.
(당시 작성한 고발목록, S펜과 키보드로 열심히도 기록 했더랬다. 사진도 찍어놓을 수 있으면 찍었다.)
우리 부서 또한 내가 발령받고 얼마안되어 '설 명절'이었기에 봉사활동을 계획하였고,
서무인 나는 모금을 받아 식료품이나 생필품을 구입하고, 기부금 봉투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팀장님, 서무(구삼일), 일반직원 이렇게 3명은 관할지역 내 보육시설을 방문했다.
방문하여 기부금과 물품들을 전달하고, 서로 덕담을 주고 받으며 훈훈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였다.
팀장님은 갑자기 화제를 전환하며 말했다.
"수녀님, 혹시 기부금 세액공제가 가능합니까?"
이 말을 들은 수녀님은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스치기는 했지만 기부금은 당연히 세액공제가 된다고 말했다.
"그럼 좀 부탁 드리겠습니다. 제 앞으로"
듣고 있던 나는 기가 찼다.
'본인 돈으로 하는 기부야 공제받는 것은 당연한데, 이건 모금받은 돈인데 남들이 낸 돈으로 웬 생색이람?'
옆에서 몰래 뱀눈을 하면서 팀장을 흘겨보고 있었는데, 사무실에 들어갔다가 온 수녀님이 말했다.
"저기, 죄송한데 어떡하죠? 기부금 영수증이랑 작성해서 드려야 하는데,
담당자가 급한 일로 자리를 비워서 한시간 뒤에 올 것 같은데.."
수녀님은 행정적 업무에 대해선 문외한인듯 했다.
팀장은 아쉬운듯,
"어쩔 수 없죠 뭐.. 추석 때 또 올거니깐 그때 몰아서 한번에 해주세요."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끝났다면 그저 모금액으로 본인 기부금 세액공제를 시도하려다 미수에 그친 것이겠지만,
팀장은 실제로 추석 때도 같은 곳을 방문하여, 추석에 모인 모금액을 본인 기부금 공제를 받는데 사용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설 명절 때 했던 기부금은 세액공제를 하지 못했다는 점일까..
8월 말에 일어난 사건이다.
추가경정예산과, 기금운영계획변경 등으로 의회의 예산결산특별위원회 2일간 열릴 예정이었다.
우리 부서는 하반기 인사이동으로 인해 예산업무가 7급 남직원에서 7급 여직원으로 변경된 상황이었다.
지자체 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지자체에서 추경관련 예산결산위원회를 2일만에 끝내는 것은 쉽지 않다고 했다. 말이 2일이지 그 기간안에 모든 안건이 조율되어 완료되려면, 새벽까지도 예결특위를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당연히 예결특위 동안 예산 담당자는 마음을 졸일 수 밖에 없다.
예결특위는 사업의 중요성과 타당성을 평가하기 위해 여러 질의를 거친 뒤에 '계수조정'이라는 것을 한다.
'계수조정'이란 시에서 제출한 추가경정예산안의 어느 부분을 늘려주고, 어느 부분을 삭감할 것인지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의회와 시청과의 알력 다툼이자 정치적인 부분도 엮여 있기 때문에 쉽사리 결론나지 않는다.
본청에서는 계수조정을 포함한 예결특위의 모든 과정이 끝날 때까지, 관련 사업을 추진하는 부서의 주무팀장과 업무담당자가 대기한다. 언제 요구될지 모르는 요청자료와 추가 질문에 대응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우리 기관에서는 이번 추경 때 이슈가 없다고 했다. 신생청인 이유로 본격적인 사업확장을 못하다보니, 추가경정예산 관련해서 크게 이슈될 건덕지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의원님들의 질문이나 자료요구는 없을 것이니, 대기를 하지 않아도 되지 않냐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기관장님은 본인이 예결특위가 마무리 되는 자리에 나가야겠다고 고집을 부리셨다.
예결특위가 금일 회의를 끝내는 자리에는 종종 시청의 국장님들이 자리를 같이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기관은 시청과 의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우리 기관장님은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다른 국장님들처럼 예결특위의 마지막을 같이 하고 싶어하셨다.
내가 발령받은 기관은 시의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의회에 가서 대기를 해야 했다.
예결특위가 마무리 되어갈 때쯤 연락을 취해서 기관장님이 관사에서 나와서 예결특위의 마지막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해야하는 모양이었다.
보통은 주무 팀장인 우리 팀장과 예산담당인 7급 여직원이 나가서 대기해야 하는데,
(명분은 예결특위이니,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예산담당자가 있어야 하는게 통상적이다.)
팀장은 그게 싫었다보다. 한참 골똘히 생각하던 팀장은 이야기했다.
"구삼일 씨가 가서 좀 대기하고 있어."
"네..?"
"그 우리꺼는 자료요구나 추가질문 안나올거니깐 그냥 가서 동향만 살피고 있으면 돼,
그러다가 계수조정 끝나면 기관장님께 연락해서 마지막 자리만 지킬 수 있도록 하면 돼"
예결특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르는 새파란 9급에게 기관장 호출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긴 거다.
그리곤 팀장은 마치 선심 쓰듯이 말했다.
"자네만 고생하는거 아니야, 운전직 주무관도 관사 앞에서 대기할 거고, 기관장 비서실에서도 한명 나온다고 했으니깐 자넨 아무 걱정마."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관장님은 예결특위의 계수조정이 마무리 되는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계수조정이 밤 12시가 넘어서야 조율이 되는 바람에, 지칠대로 지친 의원들이 빠르게 회의를 종료했기 때문이었다. 마무리 되는 것을 보고 연락했지만 청장이 준비를 하고 출발을 하기 전에 예결특위가 마무리 되어버렸다.
집에 도착해서 잠이든 것은 새벽 2시, 다음날 8시 이전 출근.
초과근무 인정은 고작 4시간.
더욱 웃긴 것은 첫날은 기관장 참석을 실패했기 때문에 다음날의 예결특위에도 대기를 명 받았다는 것이다.
다행히 다음날은 오후 8시 이전에 끝났기에 그리 오래 대기하진 않았다.(?)
하루는 아침 일찍 출근한 내가 가방을 내려 놓기도 전에 팀장이 나를 호출했다.
(나도 차가 막히는 게 싫어서 일찍출근하는데, 팀장은 6시 30분~7시 정도에 출근하곤 했다.)
다짜고짜 나를 붙잡고 어디를 좀 가자고 했다.
그리곤 나를 데려간 곳은 지하주차장 팀장의 차 뒷편이었다.
엎드려서 차량 밑에 쪽을 봐보라고 호들갑을 떨며, 나에게 말했다.
"구삼일이 저거 철판좀 어떻게 해봐!"
자세히 보니, 차량 배기구 옆에 있는 철판이 구부러져 이상한 모습으로 땅과 닿아있었다.
아마 부식된 철판이 빤쯤 떨어져서 바닥에 끌리는 것 같았다.
"이걸 제가 어떻게 해요..?"라는 나의 물음에
"저기 기계실가서 뺀치랑 실톱같은걸로 좀 썰어봐봐. 차가 움직일때마다 끌리는 소리가 나서 못듣겠어."란다.
못한다고 공업소 가시라고 했는데도, 막무가내로 조금만 하면 될 거같은데 시도 해보라고 난리였다.
아마도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 가장 구두쇠였던 그 팀장은 공업소에 가서 몇분이면 해결 될 일에 돈을 쓰는 것은 용납이 안되는 모양이었다.
결국에는 내가 처리했다. 땀이 나게 톱질도 하고 뺀찌로 여러번 구부리고 하다보니 철판이 떨어졌다.
그리고 쓰레기통에 버리고 사진을 찍었다. 고발목록에 적고 증거를 남겨두기 위해서 였다.
(위에 올린 사진 중 하나가 그 증거로 찍어 놓은 것이다.)
공교롭게도 1시간 일찍 출근했지만 출근체크도 못하고 팀장에게 잡혀온 나는 정시 출근으로 계산되어, 초과근무시간도 인정받지 못했다.
나는 기관의 주무부서의 서무이자 비상연락망을 작성하는 업무도 맡고 있었다.
어느날 팀장이 비상연락망이 잘 작성됐는지 체크한다며, 비상연락망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팀장은 기관 전체 인원의 비상연락망을 유심히 보더니 이내 웃음을 띄면서 말했다.
"우리 아파트에 2명이나 살고 있었네!"
그렇다. 공교롭게도 타부서의 여직원 2명이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었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설마. 카풀때문은 아니겠지?'
나는 온갖 호구같은 부탁은 많이 들어주면서도, 카풀사건만큼 분노를 직접적으로 내비친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팀장은 나에게 더이상 카풀을 요청하지 않았다.
'에이 그렇다고해서 잘 모르는 타부서 직원에게 그걸 요청하겠어? 심지어 여직원들인데?'
그는 상상을 뛰어넘는, 범부는 이해 못 할 경지에 있는 사람이었다.
얼마안가 소문이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팀장의 모임 날, 얼굴만 아는 여직원에게 같이 출근을 하자고 했다가 단칼에 거절당했다는 소문이었다.
또래의 공무원들끼리 커피를 마시다 '너희 팀장 왜이래?'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말했다.
"얼굴만 아는 주무관님한테도 그러는데, 나는 오죽하겠어요.."
다들 측은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