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회자정리, 거자필반

떠나간 제자들을 생각해야만 할 때

by 범수

학원에 있을 적에, 학생들에게 사자성어 시험을 보도록 했다. 아마 학원의 취지는 '어휘력 신장', '수능 문제(이제는 나오지 않는다)'를 위함일 것이다. 학생들의 시험지를 채점하고 풀이해야 하기에, 덩달아 필자도 팔자 없는 사자성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슬픈 현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다, 유독 두 성어가 눈에 띄었다.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 회자정리는 '모든 만남에 결국 이별이 온다'는 의미이며 거자필반은 '모든 이별 뒤에 결국 만남이 있다'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이 두 용어를 통해 '세상은 만남과 이별이 반복된다'라는 이치를 만들어 냈다.


간간히, 이제는 멀어진 제자들의 안부 인사를 받는다. 늘 생각하지만, 떠난 사람을 의도적으로 떠올리고 안부를 묻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각자가 너무도 가파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특별한 날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종종 연락해서 안부를 물어주는 일이 얼마나 고마운지. (또, 스스로가 그러지 못함에 얼마나 미안한지)

그럴 때마다 직업을 참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든다. 알랭 드 보통은 「슬픔이 주는 기쁨」에서 "일의 행복을 기대하지 않는 편이 인생의 슬픔을 다독일 수 있다"라고 했다.(책의 전체적인 내용과는 다르지만) 교단에 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문장이 흠뻑 공감되었는데, 이렇게 가치관이 바뀌었단 것에 스스로 놀랍다. 필자는 이 일에 큰 기쁨을 느끼는 편이다. 시간 내어 안부 연락을 해준 제자들, 꼭 멋진 사람이 되어 다시 만나기를 소망한다. 회자정리, 그리고 거자필반과 같이.


우리는 늘 누군가(혹은 무언가)를 만난다. 그리고는 헤어진다. 또 누군가를 만난다. 당연하게도 우리 인생은 회자정리와 거자필반의 연속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회자정리도 거자필반도 우리가 선택할 기회는 거의 없다. 그렇기에 삶은 따갑다. 우리는 자주, 이별에 아프고 만남에 설레지 않는가. 구구절절한 노랫말을 뜯어보지 않더라도, 그 무력함 앞에서 오는 가슴의 찌릿함은 금방 느낄 수 있다. 무심한 회자정리가 원통하고 막연한 거자필반을 의심한다.


그래서인지, 옛날에는 떠나는 이들을 웃으며 보내고 싶었다. 어차피 바꿀 수 없는 것이 이치라면, 소월처럼 꽃이라도 뿌려주던가, 이산처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것이라 굳게 믿고 싶었다. 항상 마음에 담아 두는 이별 장면이지만 성공해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조금 더 많은 이별을 마주했을 때, 역설적이게도 이별의 아픔이 주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슬픔이 나를 이끈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누군가와의 이별에 아파하고 가슴이 저릿할 때, "내가 제대로 된 인간이구나"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어쩌면 적지 않은 이별 속에서 앙금의 모양이 나름대로 정해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필자나 그 주변이,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새겨진 앙금을 직시하고 성숙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러다 보니, 또 시가 한 편 떠오른다. 고재종 시인의 「성숙」이다.


성숙


바람의 따뜻한 혀가

사알짝, 우듬지에 닿기만 해도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짜갈짜갈 소리 날 듯

온통 보석 조각으로 반짝이더니


바람의 싸늘한 손이

씽 씨잉, 싸대기를 후리자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후두둑후두둑 굵은 눈물방울로

온통 강물에 쏟아지나니


온몸이 떨리는 황홀과

온몸이 떨리는 매정함 사이

그러나 미루나무는

그 키 한두 자쯤이나 더 키우고

몸피 두세 치나 더 불린 채


이제는 바람도 무심한 어느 날

저 강 끝으로 정정한 눈빛도 주거니

애증의 이파리 모두 떨구고

이제는 제 고독의 자리에 서서

남빛 하늘로 고개 들 줄도 알거니


'보석 조각'처럼 '반짝'이던 만남과 '눈물방울'로 얼룩진 이별을 마주한 이들이, '정정한 눈빛'으로 '고개 들' 날이 오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수선화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