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 입원 예정인 날, 혈액종양내과 외래 진료도 잡혀 있어서 서둘러 집을 나섰다. 북부간선도로 진입부터 주차장인 걸 보고 제시간에 도착하기는 이미 글렀다는 걸 직감했다. 그러지 않아도 늘 막히는 길인데 출근길 러시아워에 끼어들었으니 늦는 건 각오해야 했다.
성산대교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몇 차선을 끼어들어야 한다. 왼쪽 깜빡이가 내 심장소리만큼이나 빠르게 뛰었다. 어쨌거나 나는 남편 덕에 운전에 도가 터 가는 중, 건너 건너 내가 목표하는 왼쪽 차선에 버벅거리지 않고 안착할 수 있었다. 운전 실력 제법이라는 칭찬을 받고 싶어서였을까. 남편을 돌아보았다. 내가 바라보는 이유를 알 턱 없는 남편은 세상 어떤 것에도 관심 없다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혈액검사에 조금 늦은 탓일까. 예약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외래를 볼 수 있었다. 담당의는 검사 결과가 나쁘지 않다고 하면서도 찜찜한 표정으로 화면만 바라봤다. 그러곤 남편의 2주 동안의 안부를 궁금해했다. 파리한 안색에 더 내려갈 게 있을까 싶던 체중계 바늘이 지난번보다 2kg 그램이나 빠져 있고 뜬금없이 간수치까지 높게 나왔다니 그럴만했다. 남편이 어린양 하듯 귀가 웅웅거려서 말이 잘 안 들린다는 말을 꺼내자 항암 못할 핑계를 잡았다는 듯 그렇담 항암을 못 한다고 못을 박았다.
뇌진탕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을 때 항암을 하면 안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난번에 보지 못한 CT 영상을 펼쳤다. 그러니까 6월에 찍은 CT와 약을 바꾸고 4개월에 걸친 8회 항암 후에 찍은 CT를 비교해 놓은 화면이었다. 잘 모르는 내가 봐도 현저히 달랐다.
췌장 쪽 암도 줄었고 간에 산발적으로 분포되어 있던 암세포가 몇 개 되지 않을 만큼 줄어 들었다. 이 획기적인 결과를 보면서도 우리는 좋아할 수 없다니. 담당의는 바로 연이어 항암을 해서 효과를 극대화시켜야 하는데 뇌진탕 후유증으로 못하게 되어 걱정이라고 했다. 그래서 더 아쉽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여튼 지금 체력으로는 ‘항암 절대 불가’ 판정. 계속하고 싶다고 조를 수도 없는 게 항암이다. 항암은 못 해도 입원해서 영양제 맞고 이튿날 이비인후과 진료까지 보고 퇴원하면 좋겠는데 우리 바람대로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10차까지는 무난히 통과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뇌진탕에 발목이 잡혔다. 그렇게 하기 힘든 항암이지만 막상 못한다고 하니 허탈했다. 진료실을 나온 남편이야말로 걸을 힘이 없는지 의자를 찾아 간신히 앉더니 고개를 푹 숙인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한 시간 반가량은 달려가야 집인데 그때까지 빈속으로는 안 될 것 같았다. 병원 근처에서 먹고 갔으면 해서 남편에게 물었다. 물은 게 잘못이지. 그는 이것도 저것도 다 싫다고 했다. 먹자는 말에 그냥 싫은 게 아니라 아주 질색하면서 고갤 저었다. 싫은 건 남편 뜻이고, 나는 약 타온다는 핑계를 대고 얼른 김밥집으로 뛰었다. 유부초밥을 포장했다.
항암이 식욕을 앗아가더니 배가 부르고 고픈 것도 못 느끼게 하나. 아침에 수프를 뜨다 말았을 뿐인데 유부초밥을 펼쳐놓자 인상을 쓰며 내 쪽으로 밀었다. 그걸 보자 열이 받쳤다. 조금만 움직여도 기진맥진이면서 먹으라고만 하면 사약 보듯 하니 미칠 노릇이다.
“제발 그러지 좀 마요. 왜 먹어야 하는지 몰라서 그래? 나한테만 인색하게 구는 이유가 뭐야?
남편이 안 먹겠다고 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다. 굳이 화까지 낼 건 없었는데, 무엇에 씐 듯 쏟아내고 말았다.
뇌진탕 후 달라진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에 긴장해 있다가 항암도 못 한다지 남편은 화를 내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아닌 내가 아무렇지도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이미 쏟아진 물인데 그의 반응이 무서워 찔끔 후회하면서 (그가 아픈 후로 난 모든 일에 그의 눈치를 보는 여자로 변해버렸다) 그냥 넘어가 줬으면 했다. 그가 버럭 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둬. 죽게 내버려두면 되잖아!”
허헉! 이젠 해서 되는 말 안 되는 말 구별도 안 되는 모양이었다. 항암도 못 하는 심정 말이 아닌 건 알지만, 그래 너 잘 만났다 싶은 걸까.
병원에 갈 때 막히던 길이 집으로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길이라도 뚫렸으면 쌩 달리면서 기분이라도 풀리련만... 무슨 날이 이런가... 기름도 간당간당할 것 같아 계기판을 보았다. 바늘이 만땅 가까이에 서 있었다.
아, 내 딸! 제 어미가 주유소 들어가는 수고로움이나마 덜어주려고 눌러 밟듯 가득 채워 놨나 보구나. 힘은 들어도, 말없이 마음 써주는 수많은 우렁각시 덕에 이나마 지탱하고 있다. 치받치는 그 무엇을 애써 누르며 등을 반듯하게 폈다.
저번 10차 항암을 마치고 퇴원한 날 뇌진탕을 당했듯이 남편은 병원에 다녀온 날이면 불안한 걸까. 이번에는 항암을 하지 못하는 충격이 컸을까. 일전의 섬망과는 또 다른 증세가 밤새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을 뿐 거의 잠을 자지 못하는 남편. 눈을 뜨고도 감고도 잠꼬대를 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영 모르겠는 말들을 끊임없이 토해냈다.
피곤에 지쳤는데도 잠은 달아나고 남편의 잠꼬대만 내 귀를 파고들었다. 거실을 서성이다 잠자리를 옮겨보다 별짓을 다 해도 소용없었다. 내일 이비인후과 진료가 출근 시간과 맞물려 있어 평소보다 일찍 나서려면 잠을 좀 자 둬야 하는데 잠을 반납해 버린 나의 뇌파는 각성상태를 유지한 채 새벽을 건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