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 진통제 먹을 시간이 넘었는데 아직 통증이 없나 보다. 이럴 때 약도 먹이고 밥도 먹여야 한다 생각하니 마음이 바쁘다. 통증 시작된 후 약을 먹으면 진정되기까지 그나 나나 너무 힘들다. 고통스러워하는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고 바라보기가 너무 괴로워 애써 외면할 때도 있다. 몸서리치도록 힘든 사람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다는 말을 이렇게 함부로 한다.
밥도 미리 먹여야 한다. 고통 중에는 더 더 더 먹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새로 죽 끓일 시간이 없다. 어제 만들어 둔 전복죽을 가스에 올린다.
현미차로 목을 축이게 하고 사과 조각에 땅콩 잼을 발라 남편의 입에 넣어준다. 오랫동안 그렇게 습관이 된 사람처럼 그가 입을 벌려 내가 주는 걸 받는다. 사과 씹는 소리를 들으며 남편 앞에 있던 죽 그릇을 내 앞으로 가져온다.
어차피 내가 떠먹이면서 왜 여태 그이 앞에 그릇을 놓고 떠먹였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내가 먹을 것처럼 내 앞으로 당긴다. 그의 입으로 죽은 들어가지만 결국 내가 먹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의 에너지가 곧 내 에너지이고 나의 에너지가 남편의 에너지가 되기도 하니 우린 누가 먹어도.... 아 이러다 미치는 거 아닐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뜨거울까 봐 죽 그릇 가장자리 쪽을 훑어 한 수저 뜬다. 그가 다시 입을 벌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죽을 넣어준다. 주고...받고... 이 연속 행위가 오랜 연습에서 만들어진 극처럼 자연스럽고 익숙하다. 물을 찾는 것 같아 물컵을 내미니 손으로 받지 않고 입이 온다. 하하하 나의 귀여운, 아가가 된 남편.
떠 넣어 주는 일, 계속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할 때마다 낯설다. 아니 익숙하다고 해야 맞는데 나는 왜 낯설다는 표현을 할까.
오래전 입이 짧은 딸아이에게 어떻게든 먹이려고 별 아양 다 떨어가며 밥을 떠먹였다. 딸 어렸을 때부터 자라는 걸 계속 봐온 지인들은 말한다. 제 엄마 숟가락 끝에서 살아난 아이라고. 너무나도 먹지 않아서 저러다 잘 못 되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고. 어려서 안 먹은 거에 비해 잘 자라준 딸은 어느새 제 엄마와 팔씨름에서 밀리지 않는 건강한 사내아이의 어미가 되었다. 딸 이야기를 하다 보면 지인들은 숟가락 들고 따라다니던 내 모습만 떠오른다며 웃는다.
손자에게도 이유식 때부터 내가 제 할아버지한테 매이기 전까지 밥을 떠먹였다. 빨리 먹이기 위해서 떠먹이고, 많이 먹이려고 또 떠먹이고, 잘 받아먹는 모습이 예뻐서 자꾸 떠먹였다. 흘린 밥풀 손으로 집어 먹어가면서 기쁜 마음으로 그 일을 반복했다. 딸과 달리 손자는 주는 대로 잘 먹었는데도 떠먹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밥을 떠 넣어 주는 게 처음이 아닌데 낯이 설다. 밥 떠 넣어 주는 일이 자연스럽고 익숙한데 낯이 설다는 내 말의 어폐를 짐작하고 남으리라.
익숙한 손놀림으로 죽 뜨는 행위를 반복한다. 싫다 좋다가 아닌, 그냥 지금 가장 중요한 나의 일이다. 이 한 수저의 에너지가 그의 몸과 마음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남편에게 죽을 떠먹인다는 일,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을 나는 해야 하고 지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