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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길 Mar 28. 2023

07.  무식하면 죽을 수도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를 읽고

 그날은 유난히 물오리들만 보였다. 걷는 건지 오리를 보는 건지 구분할 수 없을 때쯤 '이팝나무길'이라는 안내문을 만났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다 자란 이팝나무들이 호위병처럼 줄지어 서있었다. 적어도 20년은 훌쩍 넘어 보이는 나무들이었다. 참으로 멋진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관상 보듯이 천천히 나무의 생김새를 보았다. 버짐 하나 없는 줄기는 반듯한 정장을 입은 듯 뒤틀림조차 없었다. 거기에 탁월한 공간구성력을 자랑하며 골고루 자란 잔가지들이 촘촘하게 위로 향해 뻗었는데 마치 잘 만든 부케 같았다. 나무를 가려내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조금의 과장도 없이 수형이 빼어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쩜 저렇게 멋스럽게 잘 컸지. 나무에게 품격이 있다면 저런 모습일 거야.'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이팝나무하면 무식으로 범벅된 추억이 하나 있다. 무식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준 사건이다.

우리 부부는 뜻하지 않게 논산 고향집 근처에 땅을 구입하게 되었다. 우선은 당장 필요하지 않아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내팽개친 땅에는 잡목이 터를 잡고 물 만난 고기처럼 풀이 키를 넘었다. 궁리 끝에 그 땅에 ‘이팝나무’를 심었다. 나무는 거름 하나 없는 땅에 뿌리를 내리느라 삭정이처럼 메말라갔다. 몇 년이 지나도 나무꼴을 볼 수가 없었다.


  "저렇게 비리비리하게 생겼는데 제대로 크겠어"

  "알아서 크겠지 뭐"


  우리는 정작 ‘이팝나무’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무를 한 번도 길러본 적이 없는 완전 초보였다. 그래서 더 무식하게 나무를 돌보았는지도 모른다.


 본격적인 풀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초보 농부가 흐뭇할 만큼 한여름 햇빛에 나무는 제 키를 무럭무럭 키웠다. 그런데 비가 내린 이후에는 따뜻한 햇살에 경쟁하듯 풀이 드세게 올라오는 것이다. 시간이 많고 근처에 살면 자주 뽑아라도 줄 텐데 우리는 당진에서 살고 있으니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다. 햇볕이 뜨거울수록 나무보다 풀이 더 잘 자랐다. 손이 닿지 않으니 나무밭인지 풀밭인지 모를 지경에 이르자 남편이 결단을 내렸다. 풀을 베겠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해도 뜨기 전에 일어나 낫을 잡았다. 아침도 간단히 먹고 낫질은 계속되었다. 해가 떠오르고 여름 열기가 점점 강해져도 낫질은 멈추지 않았다. 낫을 들어도 시원치 않으니 예초기까지 동원했다. 예초기 소리가 더위만큼 신경질적이었다. 새벽부터 풀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남편은 땀범벅이 되었다. 엄마는 그런 사위를 보며 한 걱정을 했다.


  "이 사람아, 더위 이길 장사는 없는 베벼(법이여)"

  "여보, 큰일 나겠어, 얼른 나와요."


 농사 한 번 짓지 않은 사람이 그러고 있으니 더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남편은 풀에게 지고 싶지 않았는지 쓸데없는 의지를 보였다.  '조금만, 조금만 하면 돼.' 하면서 뜨거운 해가 정수리에 오를 때까지 풀과 전쟁을 치렀다. 그러다 더는 일할 수가 없는지 예초기를 메고 집으로 돌아왔다. 풀은 대략 다 베었다고 했는데 얼굴이 술을 먹은 사람처럼 시뻘건했다. 열이 오른다며 어지럽다고도 했다. 나는 속으로 혹시 일사병이 아닐까 걱정을 했다. 다행히 남편은 찬물로 씻고 소금을 한 스푼 먹은 뒤에 진정이 되었다.

 

 그렇게 초보 농부는 죽을힘을 다 해 나무를 돌봤고 지금은 고맙게도 잘 자라고 있다. 그런 나무가 10년이 지나자 달라졌다. 수형도 제법 잡혀서 우리가 산책하는 당진천의 이팝나무꼴을 보여주었다. 밑에선 여젼히 풀이 자라고 있지만 이제는 경쟁상대가 되지 않는다. 나무그늘이 생기니 서서히 풀도 제풀에 꺾이고 말았다. 봄이 되고 밥풀 같은 꽃을 하얗게 피울 때는 풍요로운 한 해를 점쳤던 엣 선조들의 점괘가 맞기만을 바랐다. 바보같이 덤벼들며 풀과 전쟁을 치렀고 결국 키워냈다고 하지만 어쩌면 나무에게 배운 게 더 많았다. 바람 불 때를 기다린 연처럼 나무는 이미 땅에 뿌리를 내리면서 견뎌낼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걸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by 오솔길

 

 “나무에게 땅에 묶여 평생을 사는 게 숙명이라면, 뿌리를 내린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은 운명이다. 나무란 놈은 워낙에 그걸 잘 알고 있는지 일단 뿌리를 내리고 나면 주변의 환경에 강하게 맞선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어도, 이 땅 어느 생명보다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 준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나무는 느슨한 법이 없다.” -본문 중에서

 


  

 남편은 요즘 이상한 소리까지 한다. 해가 뜨고 지는 때를 보면 어떤 나무를 심어야 하는지, 그에 맞는 적당한 양의 거름을 언제 줘야 하는지 안다고 했다. 그리고 낫을 들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풀을 단 번에 잡을 잡초제를 뿌리는 시기와 방법이 있다며 줄줄이 말하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믿게 된다. 땅만 봐도 나무가 잘 자랄 곳인지 예언까지 하는 걸 보니 제대로 풍월까지 읊어댄다. 무식하게 덤빈 덕분에 나무가 되려 알려준 게 많은가 보다. 나는 그런 남편과 나무를 볼 때마다 겉으론 웃지 못할 이야기라고만 말하지만 사실은 둘 다 자랑스럽다.



소소한 책그림 후기 ;  이팝나무 이름의 유래는 3가지가 있다. 절기인 입하(立夏)무렵에 꽃이 피어 변음한 것, 이 꽃이 만발하면 풍년이 들어 쌀밥(이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 하얀 꽃이 꼭 쌀밥을 연상시켰다는 것이다. 올해도 난 이팝 꽃을 기다린다. 

오늘의 책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우종영, 메이븐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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