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세 번째 집은 욕심을 부렸다. 큰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방은 두 개 정도 필요하고 직장과의 거리가 멀지 않기를 원했다. 때마침 건축업을 하는 사람이 새로운 공법으로 집을 지었다며 입주를 권유했다. 방 두 개에 주방 겸 거실도 있었다. 직장이 그리 멀지 않다는 점까지 마음에 들었다. 우리 부부는 이사를 서둘렀고, 그 건물의 첫 번째 입주민이 되었다.
이사하던 날, 이삿짐 직원이 옷장을 옮기며 한숨지었다. 겨우 균형을 잡은 그들은 평평하지 않은 방바닥이 문제라고 말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옷장을 바로잡으려 애쓰는 그의 얼굴에서 걱정이 묻어났다. 새 건물이라고는 하지만 시멘트 냄새가 역하게 올라왔다. 무엇보다 화장실 수돗물이 잘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 입주할 만하다는 말을 믿고 들어갔는데 2층은 아직 공사 중이었다.
집은 도심에서 벗어난 변두리에 있었다. 시골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그때만 해도 생소한 철골 구조물로 지은 2층 건물이다. 지금은 철골 집을 어디서든 볼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다세대 건물은 흔하지 않았다. 각 층에 다섯 가구씩 총 열 가구로 지어진 작지 않은 규모여서 마을 사람들도 처음에는 공장이 들어선 줄 알았다고 한다.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이고 비싸지 않았던 전세 금액이라 빈집은 금세 채워졌다. 연립주택도 아파트도 아닌 가설물 같은 주택에 전세로 들어온 걸 보면 입주민들의 경제적 여건은 그만그만했다.
이웃들과 친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비슷한 처지로 들어온 사정을 알기에 바쁠 때는 아이를 봐주고 음식도 나누었다. 넓지 않아도 마당까지 있었다. 아이들이 노는 장소이면서 어른들의 대화 장소로 쓰일 만큼 요긴했다. 층간소음이나 주차 문제로 건조해진 요즘의 아파트 생활을 생각하면 2층 주택 주민들은 그래도 훈훈했다. 이웃이 늘어나면서 난 집이 전보다 든든했다.
다만, 그 집은 아이를 키우기에 불편했다. 마트는 물론이고 작은 가게조차 없는 마을이었다. 전세 기간인 2년을 마친 후, 다음 집은 여기보다 나은 곳으로 옮기고 싶었다. 아마 이웃들도 비슷한 바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약속된 2년을 채우지 못했다.
낯선 이들이 2층 주택을 찾아왔다. 은행 직원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참담하고 허탈했다. 103호 할머니는 문을 열며 들으라는 듯이 마구 욕을 쏟아냈다. 처음엔 보이지 않는 집주인을 향해, 나중에는 아무나 붙들고 억울해서 어찌 사냐고 지칠 때까지 가쁜 숨을 뿜어냈다. 그러나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건물주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부도를 내고 몰래 도망갔다. 전세금이 거의 전 재산에 해당할 정도로 가난한 이들의 억울함을 아무도 풀어 줄 수 없었다. 건물주를 아무리 원망하고 욕을 해도 법적으로 소용이 없었다.
대책 회의가 열렸다. 논의 끝에 나온 방법은 공동명의. 당장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기대로 한마음이 되었다. 누군가는 도시 외곽인 이곳이 곧 개발 지역이 될 거라고 말했다. 구체적인 근거와 자료는 없지만 그런 흔적을 여기저기서 찾았고 우리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렇게 세입자들은 건물을 공동명의로 매입하자는 의견에 모두 찬성하였다. 개발이익까지 챙기면 전세금을 회수하고도 남을 수 있다는 기대가 어제의 한숨을 웃음으로 돌려놓았다.
행복한 결말을 기대하며 합의한 계획이 점차 삐거덕거렸다. 꿈에서 깨어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공동명의는 복잡한 절차가 요구되는 일이며 모든 이들의 신뢰와 믿음이 필요했다. 특히 부동산과 건축물을 매입하는 방법으로 구체적인 금액을 정하는 회의에서 의견이 갈렸다. 한껏 기대에 부푼 우리는 현실적인 문제를 풀지 못하고 갈등 앞에서 허우적거렸다.
급기야 포기하겠다는 이웃이 생겼다. 우리 부부는 그들을 보내기가 아쉬웠다. 그들은 객관적이었고, 대화가 잘 통했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고 이제라도 빨리 떠나세요. 이건 쉽지 않을 거예요.”라는 말을 남기고 미안하다며 떠났다.
그 이웃의 예상은 맞았던 걸까. 한때 이상적인 주택을 꿈꾸며 다가올 개발에 대한 희망을 품었던 입주민들은 차츰 단념하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매입할 돈이 부족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채, 이웃들은 하나둘씩 떠나갔다.
전셋집이 은행으로 넘어가는 일은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에서 자주 발생하는 문제다. 뉴스를 통해 전세 사기를 당했다는 소식을 심심찮게 듣는다. 젊었던 그 시절, 우리 부부도 빈집을 구하지 못해 변두리로 밀려 나갈 정도로 돈이 부족했다. 그래서 전 재산이나 다름없던 집을 잃은 젊은 세입자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을 때마다 남 일 같지 않다. 견디다 못해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할 말을 잃는다. 이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건이다. 서민들에게 집이 주는 무게감은 생각보다 크다. 그래서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잃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 담긴 기억, 안전, 소속감 등을 잃으며 깊은 상실감에 빠지게 된다.
예상은 했어도 그렇게 빨리 마을이 사라질 줄은 몰랐다, 모두가 떠난 후 그 일대는 도시 개발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고 이내 시청과 상가건물이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 들어섰다. 같이 일하던 직장 동료는 “왜 이사했어? 가만히만 있었어도 대박이 났을 텐데”라며 내 속도 모르고 안타까워했다.
수년 후, 친구가 새로 이사한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놀랍게도 그 집은 내가 떠났던 마을에 지어진 아파트였다. 방문하는 날, 나는 그 주변을 한동안 서성거렸다. 기억 속에는 이곳 어딘가에 2층짜리 단독주택들과 마을 길을 따라 늘어선 논과 밭, 그리고 기와집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너무나 달라져 있어서 예전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분명 내가 살았던 곳임에도, 이제는 완전히 낯선 풍경이었다.
2층 주택은 다음 입주민을 맞이하지 못한 채 흔적 없이 사라졌다. 친구네 아파트에서 애써 그 집을 찾은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리움 때문일까, 아니면 추억 때문일까? 방 두 개짜리 소박한 꿈을 처음 이뤘던 곳, 큰아이가 첫발을 뗐던 마당이 있는 집. 그런 의미가 나를 이끌었는지는 모르겠다.
집은 생각보다 복잡한 존재다. 그 공간에 대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글을 쓰는 내내 마음은 그 집에서 다시 살고 있었다. 건물은 사라졌어도 그곳에서의 기억들이 여전히 선명했기에 가능했다. 잃어버린 집을 떠올리며, 남아있는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