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Zeroing 02화

1.1 우주의 손바닥 안의 우리

우주의 구성과 결정론

by 허지현

1.1~1.2장에서는 물리와 일부 추정을 기반으로 한 생각들이 꽤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기에 동의하지 않거나 읽기 번거로우신 분들은 1.3장으로 넘어가셔도 관계없습니다.



『서유기』 초반에는 손오공이 여래(부처)와 내기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래는 손오공에게, 자신의 손바닥을 벗어나기만 하면 천궁을 차지하게 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손오공은 금두운을 타고 하늘 끝까지 날아가, 다섯 개의 기둥 앞에 "제천대성 여기서 노닐다"라는 글귀를 새기고 오줌까지 누고 돌아옵니다. 그러나 여래는 자신의 오른손을 펼쳐 보이며, 그 다섯 기둥이 손가락이었고 손바닥 안을 벗어난 적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곳에는 손오공이 새긴 글귀와 오줌 자국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278059_222602_2016.jpg 일본 서유기 소설 삽화 (고판화 박물관)

이야기 속 옛 전설이지만,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대단하거나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결국 우주의 작은 한 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불만을 느끼고 의문을 마주할 때, 먼저 이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걱정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국 이 우주라는 구조 안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우주는 어떤 곳이며 어떻게 작동할까요?


우주의 구성과 표준 모형


우주에는 태양보다 거대한 별도 있고, 우리와 같은 생명체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들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물질의 종류는 단순한 몇 가지로 좁혀집니다. 사람을 예시로 생각해 봅시다.


사람의 신체는 몇 가지 장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장기들은 조직, 그보다 세부적으로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포는 핵, 소포체, 리소좀 등의 다양한 소기관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또 단백질, 지질, DNA와 같은 분자로 구성됩니다. 분자는 다시 원자들로 구성되고, 원자는 원자핵(양성자·중성자)과 전자로 나누어집니다. 이 중 전자는 렙톤(lepton)이라는 기본 입자 계열에 속하고, 양성자와 중성자는 다시 쿼크(quark)라는 더 근본적인 입자들로 구성됩니다.


이처럼 모든 물질의 구성요소를 파고들다 보면 결국 분해 불가능한 기본 입자들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기본 입자들은 네 가지의 근본 힘, 즉 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에 의해 상호작용합니다.


이처럼 우주의 근본 입자들과 그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이를 현대 물리학은 표준 모형(Standard Model)이라는 체계를 세웠습니다. 이 모형은 우주의 구조와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핵심 도구이며 우리가 관측 가능한 모든 물질과 상호작용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정교한 이론적 기반입니다..


1024px-Standard_Model_of_Elementary_Particles.svg.png


이처럼 표준 모형의 관점에서는 세상의 모든 현상은 기본적인 구성 요소들이 결합하여 나타난 수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정론


이 개념을 조금 더 확장시켜 설명해보겠습니다. 모든 사건은 연속적으로 일어나며, 매 순간은 직전과 직후의 순간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현재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과거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미래에 일어날 일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결과입니다.


이렇게 모든 일련의 사건을 따라가면 우리는 결국 우주 탄생의 최초 순간과 최후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은 처음부터 이미 정해진 경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결정론(Determinism)이라 부르며, 이는 뉴턴 중심의 고전 물리학이 세계관을 지배하던 19세기 시절에는 과학적 진리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당시 그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 피에르-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는 1814년 저서 『확률의 철학적 해석(Essai philosophique sur les probabilité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약 어떤 지성이 우주의 모든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히 알고 있다면, 그는 과거와 미래의 모든 사건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모든 효과는 소수의 불변하는 법칙에 대한 수학적 결과일 뿐입니다 - 라플라스

라플라스는 이 가상의 존재를 ‘지성(intelligence)’이라고 표현했으나 후대에 의해 이 개념은 ‘라플라스의 악마(Laplace's Demon)’라 불리게 됩니다. 이 존재는 무한한 계산력과 정보 접근력을 바탕으로, 우주의 모든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결정론적 세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라플라스의 사고실험은 인간 역시 우주의 일부로서, 정해진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는 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이 질문을 암시적으로 던진 셈입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실재하는가?"


스피노자와 코나투스


이 세상 모든 것이 필연의 결과라고 보는 견해는 스피노자(Baruch Spinoza)의 철학과도 긴밀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라플라스의 결정론이 제시되기 한참 전인 17세기에, 스피노자는 이미 세계를 완전히 결정된 구조로 이해했습니다. 그는『윤리학(Ethica)』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스피노자(Baruch Spinoza)



“자유란 우리가 우리 행위의 원인을 알지 못할 때 생겨나는 환상일 뿐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그에 앞선 원인에 의해 발생한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원인의 근원, 즉 최초 원인(causa sui)을 그는 ‘신’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 ‘신’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모든 존재로 드러나는 자연 자체이며, 그래서 그는 "신 = 자연(Deus sive Natura)"라는 급진적인 동일시를 제시합니다.


이러한 연속적 인과관계 속에서 인간의 사고, 감정, 행동 또한 필연의 사슬에 묶여 있으며, 우리는 단지 그 사슬의 구조를 모르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느낄 뿐이라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이 철학은 지금까지 논의한 라플라스적 물리적 결정론과 매우 유사합니다. 우주가 정해진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질서라면, 그 안의 한 조각인 인간 역시 정해진 경로를 따르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인간이 능동적으로 자기 자신을 유지하려는 힘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인간은 완전히 수동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단순한 숙명론자로 볼 수는 없습니다. 스피노자가 말하던 '자신을 유지하려는 힘'을 코나투스(Conatus)라고 부릅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자신을 보존하고, 자신의 본성을 실현하려는 경향을 갖습니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통해 인간이 단순히 정해진 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궤도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그 안에서 최선의 자기실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그는 코나투스를 수행하는 능력을 ‘활동 역량(Potentia)’이라 불렀으며, 이 역량이 클수록 인간은 더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진정한 자유란 외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인과적 위치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능동적으로 작동할 때 생기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스피노자는 일반적인 결정론자와는 차이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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