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쓰디쓴 아메리카노처럼..

커피와 대인관계

by 시절청춘

예전에는 다방이라는 곳이 있었다. 아, 지금은 다방이 집을 구해주는 사이트를 알고 있을 수 있겠지만, 40대 이상만 되어도 다방을 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커피를 마시던 곳. 커피숍은 상당히 고급진 장소로 생각하면 되고, 당시 다방은 서민들이 자유롭게 애용하던 곳이었다.


나는 군대에 입대하고 나서야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것도, 다방에서.. 선임들을 따라 얼떨결에 들어선 다방의 미닫이문을 열고 풍겨오던 그 묘한 커피 향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텁텁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끌리는 그 향은, 마치 낯선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나의 어색함과 닮아 있었다.

그러다 단맛의 마법, 커피믹스가 등장하며 나의 커피 취향은 격렬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커피 둘, 설탕 둘, 프림 둘'이라는 낡은 공식은 순식간에 기억의 뒤편으로 밀려났고, 뜨거운 물만으로 간편하게 완성되는 그 작은 봉지는 군 생활의 팍팍함을 달래주는 달콤한 위로가 되었다. 새벽 근무의 졸음을 쫓고, 혹한의 추위를 녹이며, 멍한 정신을 일깨우는 그 인공적인 단맛은, 때로는 견디기 힘든 훈련의 고통마저 잠시나마 망각하게 해주는 마법과 같았다. 특히, 담배 연기와 함께 뒤섞인 그 뜨겁고 야릇한 단맛은, 경험자만이 공유할 수 있는 은밀한 향수라고 할 수 있다. ㅎㅎ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커피믹스와의 뜨거웠던 관계에도 권태기가 찾아왔다. 어느 순간부터 그 달콤함이 텁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마시고 나면 입안에 남는 끈적함은 더 이상 상쾌함을 주지 못했다. 마치 오랜 연인에게서 더 이상 설렘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나는 자연스럽게 커피믹스에서 멀어져 갔다.

그즈음 운명처럼 나타나, 커피믹스의 빈자리를 메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극단의 쓴맛을 지닌 아메리카노였다. 검고 투명한 그 액체를 처음 마셨을 때의 당혹감이란. 왜 굳이 돈을 지불하고 이런 쓰디쓴 물을 마셔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형벌과도 같은 그 강렬한 쓴맛은, 어쩌면 그저 고통스러운 자극일 뿐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쓴맛의 끝자락엔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깔끔함과 산뜻함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어쩌면 인생의 쓴맛처럼,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지만 익숙해질수록 그 깊은 맛을 알게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점점 그 쌉쌀함 속에 숨겨진 묘한 매력에 길들여지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커피믹스와는 불편했던 관계의 작별을 고하게 되었다. 물론, 문득 그 시절의 달콤함이 그리워 습관처럼 찾기도 하지만, 이미 변해버린 내 혀는 더 이상 그 인공적인 단맛에 황홀했던 그 시절의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마치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해진 기억 속의 단맛만이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한때는 그토록 사랑했던 존재와의 어색한 재회는 어딘가 모르게 씁쓸한 뒷맛만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커피와의 관계 변화를 겪으며, 문득 인간관계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이 스쳐 지나간다. 그토록 굳건했던 관계도, 예기치 않은 작은 균열로 인해 서서히 멀어지거나, 때로는 송두리째 부서져 낯선 타인처럼 변하기도 한다. 마치 달콤했던 커피믹스가 어느 순간 텁텁하게 느껴지듯, 뜨겁게 타올랐던 관계도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지거나 불편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더욱 서글픈 것은, 매일 마주쳐야 하는 상황 속에서 불편한 관계를 애써 외면해야 할 때이다. 눈을 질끈 감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서로를 대해야 하는 그 어색함과 불편함은, 마치 쓴 아메리카노를 억지로 삼키는 것과 같은 고통을 안겨준다.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답답함, 그리고 더 참기 어려운 것은 이렇게 불편한 상황을 나 스스로가 만들어냈다는 자책감이, 내 가슴 한편에 묵직한 돌덩이처럼 자리 잡고 있어 더욱 힘들기도 하다.(요즘은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아침부터 집에서 끄적거리기 시작했던 글이 좀처럼 진전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을 안은채 사무실로 향했고, 습관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손에 들었다. 차가운 커피의 쌉쌀함이 왠지 모르게 오늘 나의 가라앉은 기분과 닮아 있는 듯했다. 사무실에 앉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이상하게 집중도 안 되고 머릿속은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커피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자꾸 엉뚱한 생각만 떠오르고 글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마치 길을 잃은 사람처럼, 나는 지금 이 글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따라 더욱 씁쓸하게 느껴지는 이 아메리카노의 맛처럼, 나의 인간관계 또한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얽혀 있는지도 모르겠다.



커피 취향과 사람에 대한 생각이 변하는 것처럼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얽힌 실타래는 풀어야 후회가 남지 않는다.



#커피 #다방커피 #커피믹스 #아메리카노 #군대 #인간관계 #취향변화 #성장 #추억 #어색함 #달콤함 #씁쓸함 #권태 #불편함 #답답함 #자책감 #방황




배경 이미지 출처 : 네이버 플러스 스토어

keyword
이전 11화필사의 무게와 창작의 존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