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시작하는 이야기 4
첫사랑과 관련된 노래를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레 오래전 그 시절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보다 두 살 많은 ‘누나’.
겉으로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둘러대며 서점에서 일하던 그 시절, 나는 그저 누나의 옆에서 동생처럼 따라다니는 존재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주 천천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게 누나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근무.
그날따라 부산 시내의 서점은 유난히 한산했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변진섭의 ‘희망사항’이 화제에 올랐다.
나는 그 노래를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는데, 누나들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ㅇ군아, 너 노래 잘 부르나?"
"뭐. 그냥.. 적당히는 불러요"
"그러면 희망사항 노래도 아나?”
“알아요.”
“그럼 한번 불러줄래?”
주저하던 나에게, 첫사랑 누나 역시 조용히 기대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용기를 내, 나는 조심스레 노래를 불렀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내 고요한 눈빛을 보면서 시력을 맞추는 여자...
김치볶음밥을 잘 만드는 여자…
내가 돈이 없을 때에도 마음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여자… 난 그런 여자가 좋더라…
노래가 끝나자 누나들은 살짝 놀라는 듯했고, 첫사랑 누나는 나를 다시 보는 듯한 눈으로 살며시 웃었다.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누나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누나는 여전히 나를 ‘동생’으로만 보았고, 그런 모습은 내 마음속 어디쯤을 계속 건드렸다.
어느 밤, 결국 결심을 했다.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 두 병을 들고 누나의 집 골목 가로등 아래 앉아서 술을 마시며,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언젠가 너의 집 앞을 비추던 골목길 외등 바라보며
길었던 나의 외로움에 끝을 비로소 느꼈던 거야
그대를 만나기 위해..
그대는 나의 온몸으로 부딪혀
느끼는 사랑일 뿐야
바로 김민우의 ‘사랑일 뿐야’였다.
그날 밤, 누나의 언니 남자 친구가 찾아온 덕에 밖에서 술에 취해 있던 나를 누나가 데리고 들어갔다.
누나 언니의 화내는 목소리에도, 누나는 나를 품에 안아줬다.
비록 방으로는 못 들어갔으나, 부엌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그렇게 누나의 따뜻한 마음을 느꼈었다.
그 이후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지만, 문제는 언제나 나에게 있었다.
군대를 앞둔 불안, 미래가 불안해하는 누나의 미묘한 반응, 그리고 어린 마음의 사춘기적 반항.
그러다 보니 감정은 자꾸만 어긋나기만 했었다.
그렇게 위태로운 순간을 지내다, 어느 날 크게 다투고 이별을 하자며 태종대 바닷가로 가게 되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한번 더 붙들고 싶었던 심정이었다.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서, 나는 조용히 조정현의 ‘슬픈 바다’를 불렀다.
그대여, 여기 바다가 보이고... 그대 떠나간 조금은 슬픈 추억 때문에 나만이 홀로 쓸쓸히 느껴지는가... 슬픈 바다가 나를 멀리 하려 하지만 바다 저편 당신의 하얀 미소가 내게 떠나가 나를 잊은 미소라 해도 그대 내 다시 당신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대 그리워 다시 찾아올 수 있겠지 나의 슬픈 바다여, 지쳐버린 내 마음 쉬어 갈 수 있는 곳 나의 슬픈 바다여.
그 노래가 끝이 날 때쯤 등 뒤에 서 있던 누나는 나를 안아주었고, 우리는 한번 더 서로를 붙들었다.
하지만 끝내 우리는 헤어졌다.
돌이켜보면 모든 책임의 거의 대부분은 나였다.
너무 어리고, 너무 미숙했고, 너무 불안했다.
남자로서 믿음을 주지 못한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마음이었다.
군에서 첫 휴가를 나와 다시 만났지만, 그 만남도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첫사랑과 관련된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지금도 나는 그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저 미안했다고, 못나게 굴어 정말 미안했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슬픈 바다’는 그 이후 제대로 불러본 기억이 없다.
그냥 내 안에서, 누나와의 첫사랑의 순수했던 감정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미숙했던 그 시절의 후회가 시간이 흘러도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커버 이미지 출처] Carat 생성 (나노 바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