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나무가 선택한 따뜻함

잿더미가 될 두려움을 넘어, 다정한 땔감이 되기로 했다.

by 시절청춘

작은 나무 하나는


작은 나무 하나는
작은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만
그렇게 그 자리에 머문다


작은 나무 하나는
작은 불씨 하나로
재가 될 수 있기에
가끔은 두려워한다


작은 나무 하나는
겨울을 이겨내는 이에게
자신의 가지를 건네주고
그렇게 불을 만난다


작은 나무 하나는
햇살 같은 따뜻함을 건네는
불의 손끝에 이끌려
조용히 가지를 뻗어본다



​흔들림을 견뎌낸 작은 나무


​내가 오랜 세월 몸담아 온 곳은 세상 사람들에게 '강인함'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그러나 이 치열한 생활 속에서도 문득, 내가 정말로 단단한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남들 앞에서는 무거운 책임감에 짐짓 강한 척하며 살아왔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여리고 낯을 가리는 사람은 아닌지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인생의 전반전을 숨 가쁘게 달려오며, 나는 과연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작은 흔들림에도 마음이 요동치는 사람이었을까.

지금이야 산전수전 다 겪은 거목처럼 서 있지만, 가만히 들여다본 나의 본질은 여전히 바람에 파르르 떠는 '작은 나무' 하나와 꼭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은 나무는 이따금 부는 실바람에도 쉽게 흔들린다.

그 모습을 보며 누군가는 연약하다고 혀를 찰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작은 나무라 할지라도,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깊게 뿌리를 내린 채 함부로 도망치지 않는다.

비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기어코 버티고, 버티면서도 끝끝내 살아간다.

어쩌면 이 작은 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이 내 삶의 궤적과 참 많이 닮아 있는 것 같다.

​나는 젊은 시절, 누구보다 성실하게 땀 흘렸고 거짓 없이 살았기에 늘 당당하다고 자부했다.

그러다 상급 부대로 자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시련을 맞았다.

나의 일하는 모습을 눈여겨본 상급자분들의 적극적인 권유로 몇 번을 고사하다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옮기게 되었는데, 보직 직후부터 선배들의 아주 차가운 대접을 견뎌야만 했다.


​몇 개월을 싸늘한 눈초리 속에 이유도 모른 채 홀로 겉돌았다.

3개월 정도가 지나서야 그 냉대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그 자리로 가기 위해 전임자를 음해하고 상급자에게 보직을 청탁했다는,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 퍼져 있었던 것이다.

능력도 없으면서 인맥으로 자리를 꿰찬 기회주의자라는 참담한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러나 곁에서 나의 본질을 지켜보고 오해를 푼 한 선배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3개월을 지켜봤는데,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어서 정말 미안하다. 앞으로는 진짜 잘해보자."


​참으로 서글프고 억울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억울하다고 소리치며 소문의 근원지를 찾아 분노하는 대신, 작은 나무처럼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뿌리를 더 깊이 내리며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냈다.

변명 대신, 땀방울과 성실함으로 나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증명했던 것이다.


​시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작은 나무가 작은 불씨 하나에도 잿더미가 될 수 있듯,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진짜 위기는 뜻밖의 순간에 찾아왔다.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만감에 빠져 경계심을 풀었을 때였다.

나의 순수한 호의는 누군가에게 아주 먹기 좋은 먹잇감이 되기도 했다.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갈 뻔했던 그 지독한 고통과 어둠 속에서 끝내 버텨 이기기는 했지만, 내면에 남겨진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또다시 상처받고 이용당할까 두려워, 나는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 두려워서 한 걸음 나서는 것을 망설였고, 다시는 남의 일에 마음을 내어주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철저히 무관심을 방패로 삼았다.


​하지만 나라는 작은 나무는 그 지독한 두려움 속에서도 결국 다시 가지를 뻗는 선택을 했다.

상처 입은 마음을 한껏 웅크리고 있던 어느 순간, 고맙게도 다시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주는 존재들을 만나게 되었다.

꽁꽁 얼어붙은 내 마음을 녹이고 다시 곁을 내어주게 만든 고마운 후배들이 있었기에, 나는 길었던 인생 전반전의 마지막 장을 다시 따뜻하게 채워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예전처럼 티 없이 완벽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다.

그저 이 작은 용기로, 누군가에게 또 다른 선한 영향력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다.

​어쩌면 그것은 작은 나무인 나 자신을 태워버릴지도 모르는 위험한 불씨를 다시 품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불은 추운 겨울을 웅크린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생존이고,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따뜻함일 수 있다.

그리고 그 따뜻함 속에서 나무는 비로소 온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작은 나무는 그 불의 온기에 이끌려 기꺼이 자신의 가지를 내어주었다.

그것은 소멸이나 사라짐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려내는 다정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선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두려움 속에 안전하게 웅크려 머물 것인지, 아니면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나 자신을 다시 한번 내어줄 것인지.

그 기로에서, 나는 기꺼이 후자를 선택하려 한다.

​작다고 해서 의미 없는 존재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작은 존재일수록 더 깊고 다정한 선택을 할 수 있다.

비바람에 흔들리더라도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굳건히 지켜내는 것.

잿더미가 될까 두려워하면서도 결국 누군가를 위한 온기를 기꺼이 선택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이 척박한 세상을 기꺼이 살아가는 진짜 이유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강함이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재가 될 두려움 속에서도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따뜻한 땔감이 되어주는 용기에 있다.


《양희은 - 상록수》

https://youtu.be/9yfLg8rySOY?si=xwFhqF8M40xlxK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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