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를 끓이는 솥, 하얀 밀가루가 건네는 위로

추억을 회상하며

by 시절청춘

한 그릇의 사랑


하얀 밀가루를
정성스레 치대던
어머니의 거친 손마디가 빚어낸
쫄깃한 위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
마치 창틀을 때리는 빗소리를 닮은
고소하고 걸쭉한 육수.


따스한 온기와 정성이 만나면
나는 어느새 추억 속 그 시절로 돌아가는
시간 여행자가 되어
깊은 행복에 젖어든다.


굳이 비가 오지 않아도
기억 속에 아로새겨진 그 시간은
행복을 한가득 담아낸
한 그릇의 벅찬 사랑이었다.




추억을 반죽하고 그리움을 끓여낸 맛


유난히 마음이 눅눅하고 울적한 날이면, 나는 솥 안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하얀 국수 가닥을 그리며 조용한 위로를 찾는다.


나는 밀가루 음식을 정말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단연 국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시청 광장에 길게 줄을 서서 배급용 국수를 받아 오던 날의 풍경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누런 종이에 투박하게 감싸인 국수 한 뭉치를 들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돌아오던 길.

그 국수 한 그릇을 먹을 생각에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분이 좋아졌었다.

걸음을 재촉하며 종이 사이로 삐져나온, 우산 손잡이처럼 둥글게 휘어진 국수 가닥의 끝부분을 몰래 뚝 끊어내어 오물오물 씹어 먹곤 했다.

짭짤하고 딱딱했지만, 세상 그 어떤 과자보다 달콤하고 맛있는 군것질거리였다.


그렇게 집에 돌아온 날이면 어머니는 당신만의 투박한 손맛으로 국수를 비벼주셨다.

별다른 화려한 고명이나 특별한 재료도 없었다.

그저 고추장과 설탕, 깨소금과 참기름을 툭툭 넣어 쓱쓱 비벼주신 비빔국수 한 그릇.

입안에 퍼지는 그 달달하고 고소한 맛 하나면 하루치 행복이 가득 찼다.

어릴 때 하도 많이 먹어 나이가 들면 질려서 입에도 대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게 면 요리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영원한 '최애(最愛)' 음식이다.


가끔 어머니는 칼국수도 끓여 주셨다.

넓은 그릇에 밀가루를 붓고 온 힘을 다해 꾹꾹 치대며 반죽을 하시던 어머니.

나는 그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앉아 군침을 꿀꺽 삼키며 그 신기한 과정을 지켜보곤 했다.

한참을 치대어 쫄깃해진 밀가루 반죽을 도마 위에 올리고, 둥근 소주병을 밀대 삼아 넓게 펴 바르던 모습.

그 위에 하얀 밀가루를 눈처럼 솔솔 뿌려 돌돌 만 뒤, 식칼로 일정한 간격으로 썰어내어 다시 탁탁 털어 펼치던 그 솜씨는 마술 같았다.

펄펄 끓는 육수에 그 면발을 툭툭 던져 넣고 끓여 낸 칼국수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그 쫀득한 손맛이 그리워 건면을 사용하는 단골 칼국수집을 종종 찾는다.

특히 오늘처럼 비가 올 듯 하늘이 잔뜩 흐린 날이면, 그 칼칼한 국물 생각이 더욱 간절해진다.


생각해 보면 내가 그 식당에 처음 발을 들인 지도 어언 35년이 지났다.

군에 입대하여 처음으로 중대 간부들과 함께 식사를 하러 갔던 곳이 바로 그 식당이었다.

누군가 휴가를 다녀오면 휴가턱을 내기 위해 으레 중국 요리나 칼국수를 먹으러 가던 시절의 단골집.

35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식당의 소박한 외관도, 정겨운 분위기도, 넉넉한 인심의 사장님도 그때 그 시절 그대로다.

가격은 세월의 무게만큼 조금 올랐지만, 푸짐한 양과 변함없는 맛은 나를 매번 1991년의 어느 날로 데려다 놓는다.

그래서 그곳의 칼국수를 마주할 때면 젊은 날의 내 모습과, 소주병을 밀며 반죽을 하시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한 그릇의 국물 속에 오버랩되곤 한다.

일기예보는 비를 점치고 있지만, 창밖은 아직 맑은 날씨를 고집하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은 유난히 얼큰한 칼국수가 사무치게 그립다.

마음 같아서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엌을 하얀 밀가루로 어지럽히며 직접 칼국수를 밀어보고 싶기도 하다.

물론 치우는 일이 고역이겠지만, 그 번거로움조차 반가울 만큼 어머니의 품이, 그리고 그 시절의 냄새가 그리운 탓일 테다.


마음이 다소 울적해진 오늘 같은 날, 뜨겁고 칼칼한 칼국수 한 그릇이 내 헛헛한 마음을 다독여주는 가장 완벽한 위안이 되어줄 것 같다.



굳이 비가 오지 않아도, 눅눅해진 마음을 다스려주는 데에는 그리움이 가득 담긴 한 그릇의 칼국수면 충분하다.


《김동률 - 오래된 노래》

https://youtu.be/uuI7SsiRCuM?si=q0XnKmZZ0GnEbHT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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