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함과 무례함은 종이 한 장 차이
남편의 직업, 남편과 내가 졸업한 학교, 친정아버지 직업, 시부모님 고향, 우리 집 차종, 심지어 우리 부부 금슬까지.
큰 애랑 같은 유치원, 같은 반인 아이가 사는 12층 엄마의 집에 놀러 갔던 첫날.
커피 한 잔 마시는 시간, 그 사이, 저의 신상은 그야말로 몽땅 털렸어요.
일방적으로 취조를 당한 건 아녜요. 그 엄마가 처음부터 자신의 남편 얘기를 시작으로 줄줄이 신상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하니 저 역시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이 자신에 대해 공개하는 만큼 상대방도 보여줄 수밖에 없잖아요.
언제부턴가 솔직함은 개인의 장점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 같아요. 자기소개서에 자신의 장점을 솔직함과 털털함이라고 쓰기도 하고, 초면에 솔직한 성격이라고 표현하면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가봐요. 솔직하게 다가가면 누구나 마음을 열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요.
사람을 처음 만나면 당연히 궁금증이 폭발합니다. 그 사람과 친해지고 싶을 때 혹은 비즈니스에 도움이 되기 위해 혹은 직원을 채용할 때 등등의 경우, 솔직하게 자신에 대해 밝혀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하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대뜸 나이를 물어보는 것도 용인되는 우리 사회. 미처 자신을 방어할 준비도 갖추기 전에 연이어 속사포 질문이 들어옵니다. 나도 모르게 줄줄이 불게(?) 됩니다.
무슨 최면이 걸린 것도 아닌데도요.
사는 곳이 어디냐 남편의 직업은 무엇이냐 아들은 어느 직장을 다니냐 등등.
차마 그럴 수 없지만, 용기 내어 '그걸 왜 물어보세요?' 하면 상대방은 아마도 '궁금해서요, 알고 싶어서요, 친해지고 싶어서요'라고 대답을 할는지 몰라요.
그렇다고 이런 일방적인 질문에 솔직하게 다 밝혀야 할 의무가 있나요?
제가 왈가왈부하는 까닭은 많은 이들이 솔직함을 가장해서 상대방의 사적 영역을 침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분명히 사적인 영역이에요. 솔직하게 밝혀야 할 의무는 없어요.
숨길 게 많아서도 아니고 거짓으로 나를 포장하기 위해서도 아녜요. 그들이 알 필요가 없는 거예요.
자신의 솔직함에 대한 반대급부로 나의 솔직함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례한 것이에요.
당신이야 속속들이 다 밝히고 싶은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라고요.
상대방에게 선의를 가장한 신상 캐기라고 느껴질 수도 있어요.
솔직함과 무례함은 아주 아슬아슬하게 닿아있거든요.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중요해요.
상대방이 무례하다고 느끼게 되면 관계가 아예 끊어질지도 몰라요.
알고 싶은 것이 그렇게 많을까요. 알게 된 정보로 무얼 하려고 그럴까요.
단지 아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상대와 나를 비교해서 우월감을 느끼려고 하는 건 아니겠죠.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먼저입니다. 아무리 친해지고 싶어도 아무리 선의라 해도 상대의 의향과 감정이 중요합니다. 상대가 불편해한다면 적당한 선에서 멈춰야 합니다.
저는 정말 불편해요. 솔직하게 사람을 대하는 것과 자신에 대해 적나라하게 공개하는 것과는 다르잖아요.
선을 넘지 않으면서 얼마든지 친해질 수 있고 얼마든지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어요.
저는 아주 친한 친구 두 세명 외에는 최대한 사적인 영역은 공개하지 않으려 해요.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세요. 남에게 지나친 시선을 두지 마시고요.
본인에게 솔직하세요. 자신을 속이지 마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