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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공지마 Aug 06. 2022

[한자썰66] 罷, 그물에 잡힌 큰 곰

속박과 위협으로 부터 자유로워 지다.

罷(마칠 파) : (그물망 망) + 能(능할 능)


罷(마칠 파)는 그물(罒(=罔))과 곰(能)이 결합한 글자다. 선인들은 큰 곰을 상대할 때에 그물을 써야만 했다. 큰 곰은 힘이 세고 너무 사나워나 창이나 칼, 활 따위 개인 병기로는 제압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罷(마칠 파)는 원래 그물로나 잡을 수 있는 대형 곰을 가리켰다.


다급한 위험 상황에는 정확한 정보전달이 중요하다. 어느 날 '곰이 나타났다'는 소리에 마을 사람들이 황급히 창을 들고 쫓아 나갔는데, 맞닥트리고 보니 덩치가 산만한 '큰 곰'이다. 그 곰을 창 따위로는 도저히 상대해 낼 수 없었던 마을 사람들은 아주 큰 낭패를 치르고 만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할 수 없이 마을 사람들은 꽤를 하나 낸다. 당시까지만 해도 곰을 가리키던 넝(能 néng)을 넣어 큰 곰을 가리키기는 罷 자를 새로 만들고, 발음도 바( bà)라고 해서 넝(néng)과 완전히 다르게 부르기로 한다. 내친 김에 성조까지 앞부분에 강세가 있는 사성(四聲)을 넣어서 긴박감을 높인다. 바(罷 bà)라는 소리를 들으면 罒(=罔)이 떠올라 그물을 챙기는 것은 덤이다. 그러니까, 罷는 일종의 위기 상황 대처 메뉴얼인 셈이었다. 주 1)


나중에 罷가 ‘마치다’로 가차(假借)가 되면서, 羆(큰 곰 비)가 '큰 곰'을 가리키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기는 한데, 잘 따져 보면 그 순서가 그렇지 않다. 곰이 能(능)에서 熊(웅)으로 바뀌자, 자동적으로 羆(비)가 큰 곰이 된다. 따라서, 罷(파)를 더는 큰 곰으로 쓸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다른 뜻으로 가차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표 1】 罷의 소전(小篆)(네이버 출처)

누군가가 폐기될 운명인 罷의 재활용을 고민했는데, 그 결과가 '마치다', '방면하다'이다. 얼핏 보면 좀 억지스럽다. 그물은 속박의 상징이다. 잡식성이라 인간과 서식지가 겹치는 곰은 수시로 인간을 위협하는 야수다. 해방 또는 자유와 통하는 개념인 ‘마치다', '방면하다'와는 그 연관성을 찾기가 심히 어렵다. 그래서인지 해설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큰 곰이 워낙 똑똑하고 기운이 세서 그물을 스스로 풀거나 찢고 번번이 달아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能이 나중에 '능하다'로 바뀌게 되면서는, 돈이나 권세에 의지한 소위 능력 있는 자들이 죄를 짓고도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부조리를 罷로 비유했다는 설명도 있다. 방식이 다를 뿐 두 가지 설명은 맥락이 같다. 영리하거나 힘 세거나 돈 많은 자들에게 '공정과 상식', '법규와 질서'는 큰 곰에게 씌운 헐거운 그물 정도밖에 안 된다는 얘기다.   


한편으로, 선인들이 큰 곰을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부족의 숭상하는 신물(神物)인 큰 곰은 포획하고도 이내 놓아주었다는 것이다. 동방 어느 땅에서 매운 마늘과 쓰디쓴 쑥을 캄캄한 동굴 속에 갇혀서 장복해야만 하는 시련을 꿋꿋히 이겨낸 암곰이 아리따운 여인, 웅녀(熊女)로 환생한다. 그녀는 곧 천손(天孫), 환웅(桓雄)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는 동아시아 어느 잘 나가는 민족의 시조(始祖)가 된다. 그런 곰을 어찌 함부로 잡아 가둘 수 있었겠나! 곰은 고대에 여러 부족들의 인기 있는 토템이었다.


어쨌든, 罷가 바뀐 뜻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은 옛사람들도 같았나 보다. 송대에 이르면 하단을 去(갈 거)로 대체한 罢(마칠 파)가 쓰이기 시작한다. 비로소 '그물을 걷어 젖히고 떠났다'는 직설(直說)이 가능해졌다. 지금은 罷의 간체자로 지정되어 있다.


큰 곰은 별자리이기도 하다. 바람둥이 제우스가 헤라의 해코지를 피하기 위해 하늘 위에 숨겨 놓은 연인이 큰 곰자리다. 그 옆을 지키는 작은 곰자리는 헤라의 농간에 빠져서 어미에게 활을 겨냥했던 사생아 아들이다. 북쪽 하늘 높은 곳에 신화를 빌어 상상으로 그려 두고 일 년 내내 우러르는 존재가 곰이다. 그 큰 곰은 덩치가 얼마나 큰지, 북두칠성을 겨우 꼬리로 달고 있다. 질투와 애욕, 그 어느 쪽에 구속도 위협도 받지 않는 크나큰 곰, 진정한 罷라 하겠다. 주 2)


사족, 能(능할 능)의 갑골문을 보면 희화시킨 야수의 모양이다. 머리와 주둥이가 크고 꼬리는 짧다. 뒷다리는 길고 발바닥이 넓다. 체형은 굵고 땅딸막하다.  미리 ‘답정곰’하고 애써 맞추니 能이 원래는 곰이었다는 설명에 그럭저럭 동의가 된다. 하기는, 학자들이 어디 갑골문 생김만 보고서 곰이라 했겠나! 관련 기록들에서 그 쓰임까지 함께 따져 이른 결론일 테니 따를 밖에 도리는 없다. ([표 2] 1, 2)

【표 2】 能의 자형 변천(百度출처)

그런데, 能은 이제 곰이 아니라 '능하다'로 쓰인다. 한낱 미물인 곰이 어쩌다가 유능(有能)해졌을까? 해설이 분분하다. 우선 곰은 영리하다. IQ가 식육과 동물들 중에서 최상위권이다. 그러니 미련 곰퉁이라는 말이 사실은 근거가 없다. 머리가 좋으니 재주 역시 뛰어나다. 재주는 곰이 넘는다 하지 않던가! 서커스에 등장하는 동물들 중에서 채찍이 필요 없는 몇 안 되는 재주꾼이 곰이다. 심지어 그 고기가 맛있다는 이유까지 들어가며 能이 ‘능하다’로 된 것을 설명한다.


어떤 글자가 그 의미가 바뀌었을 때, 원래 의미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한자는 두 가지 전략을 사용한다. 하나는 원 글자에 다른 글자를 덧붙여서 구별하고, 다른 하나는 잘 쓰이지 않는 다른 글자를 억지로 끌어다 쓰는 방식이다. 새 글자가 그럴듯하지 않을 때도 많지만 완전히 새로 만들어서 처음부터 배우고 익히는 데 수고를 많이 들이는 것보다 훨씬 실용적이다.


能은 후자다. 能이 '능하다'로 가차(假借) 되자 熊이 곰을 가리키게 된다. 熊이 원래는 곰처럼 ‘거세게 활활 타오르는 큰 불(灬(=火))'이었다. 선인들이 곰을 그만큼 사납고 두려운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타오르는 불길을 보면서 곰을 떠올리는 게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나, 동물원이나 화면에서만 곰을 만나는 현대인의 시각으로 판단할 일은 아니다. 熊이 곰이 된 지 오래지만 熊熊(시옹시옹, Xiong xiong)은 불이 활활 타오르는 모양을 나타내는 의태어로 여전히 쓰인다. 언어를 통해서 한 번 각인된 강한 이미지는 오랜 세월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熊은 곰에서 파생해 '큰 불'로 화려하게 타오르다가, 느닷없는 能의 변심(?) 탓으로 애꿎게도 곰으로 억지 환생을 당한다. 어떤 글자(能)의 의미가 변화하자 그 글자에서 파생한 다른 글자(熊)가 원 글자(能)의 원래 의미를 거꾸로 갖게 되는 아주 흥미로운 사례다.


금문과 전국 문자를 지나면서 能의 획들이 역동적이다. ([표 2]의 3, 4) 간화 되면서 큰 머리는 강조되고 입과 발이 분명해 진다. 진문(秦文)이나 소전(小篆)에 이르러 머리는 厶(사사 사), 입은 月(고기 육) 그리고 두 개의 다리와 발은 匕(비수 비)로 간략화되면서 현재와 같은 能의 원형이 된다. 이후로는 상형의 꼴을 대부분 잃어 글자 모양을 가지고는 곰이라는 것을 알기가 어려워진다. 개별 낱자들이 모두 모양자라 그 개별 의미는 아무 관련이 없다.([표 2] 4, 5, 6) 哈哈。


주) 1. 사성(四聲)이 실제로 강한 뜻을 가진 글자에 쓰이는지는 모르겠다. 강세가 앞에 있어서 느낌 상으로 그럴 수 있겠다는 추정일 뿐이다.

2. 罷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많다. 파업(罷業), 파직(罷職), 파장(罷場), 파면(罷免), 파양(罷養)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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