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수첩

112일을 함께한 눈물 젖은 수첩

by 김광희

내 프로필 대문 사진을 서울 종로구 서촌에서 찍은 네 컷 사진으로 바꿨다. 여름휴가 사진이 가을 사진으로 바뀐 거다. 요즘 날씨에 어울리는 대문 사진을 흐뭇하게 보고 있는데 게시물 활동 알림이라는 문구가 떴다. 대문 사진이 바뀐 걸 본 친구의 반가운 댓글까지 보였다. 여름부터 시작된 내 두려움에 ‘고생했다’라며 조용히 엄지 척을 들어주는 것 같아 울컥했다.


지난 7월 26일 나는 건강검진을 하면서 복부초음파를 했다. 넓적하고 두툼한 내 배 위에서 젤리 묻은 마우스가 이쪽저쪽으로 날아다녔다. 시원한 바람을 뿜으면서 날아다니던 마우스가 오른쪽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조용한 목소리로 담당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그동안 오른쪽 옆구리 통증이나 혈뇨, 체중 감소가 있었나요?”

그런 일 없었다고 대답하던 나는 초음파실 왼쪽 벽을 따라 기어오르는 무언가를 봤다. 며칠 전부터 내 살갗을 파고들던 불안이었다. 결과를 들으러 초음파실에서 한 걸음만에 내과 외래를 갔다. 진료실 천장에서 불어온 에어컨 바람에 귀를 덮은 내 머리카락들이 흔들렸다.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는데 괜스레 오른쪽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의사 선생님이 컴퓨터 모니터를 내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오른쪽 신장에 4~4.5cm 정도 혹이 있어 복부 CT를 찍어봐야겠습니다."

그 시간 이후 두려움 대신 설렘을 안고 살던 퇴직 2년 차 생활이 조금씩 흔들렸다. 환한 세상에서 살던 내가 어둡고 깜깜한 두려움 가득한 세상으로 서서히 옮겨졌다.


건강검진 전 시원한 농막에서 보드게임을 마치고 책을 펼치던 어느 날. 문득 내 팔다리로 개미가 기어오르는 듯 불안감이 찾아왔다. 이렇게 평화롭고 즐거운 날들만 지속돼도 되는 걸까? 아무리 퇴직했다지만 빈둥빈둥 편하게 놀아도 되는 걸까? 웃을 일만 있는데 왜 불안하지?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타인과의 비교에서 불안이 시작된다.’라고 했다.

내 불안의 시작은 치열했던 퇴직 전 생활과 지금을 비교하면 서였던 것 같다. 그날 창문으로 햇빛이 길게 들어선 순간. 펼친 책 페이지 속에 '평온과 즐거움에 휩싸여 있는 날들이 혹시 내 삶에 정점일까?'라는 문구가 아른거렸다. 정상에 깃발을 꽂았으면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는데. 피부를 자극하는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에 빠져 깊은 한숨이 세 나오더니. 숨어있던 불안이 건강검진 결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복부 CT를 찍은 후 내 손엔 3차 병원 진료를 위한 ‘진료 소견서’가 쥐어졌다. 2년 전에도 복부초음파를 했던 나에게 아마도 종양이 오른쪽 신장 중앙 깊숙하게 있어 발견이 어려웠을 거란다. 2년 동안 이렇게 커졌을 거라는 설명까지 듣고 집으로 왔다. ‘멍’ 한 상태로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버벅거리다 보호자인 딸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전화했다. 처음엔 겨울바람에 문풍지가 떨리는 것 같던 딸은 잠시 숨을 멈춘 뒤에야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나에게 오겠다며 별일 아닐 거라고 말했다. 나도 주문을 외우듯 그럴 거라고 답했다.


더위와 습기가 가득 찬 날. 서울 A 병원에서 MRI를 찍고, 오른쪽 신장 전체 절제를 해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딸은 두세 군데 더 진료를 받아보고 결정하자 했다. 여전히 '멍'한 상태였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매주 두근거리며 글을 올리던 브런치에 잠시 안녕을 고했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에 있던 웹도 지웠다.


동생 가족들의 도움과 걱정을 품에 안고 딸, 사위와 서울, 인천, 분당, 부천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땀이 흘러 세수를 한다며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던 딸의 눈가는 짓무르기까지 했다. 나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쓴 딸의 눈물은 한강물을 더 찰랑거리게 했다. 사위는 바람개비처럼 휘청거리는 딸과 내 뒤를 묵묵하게 지켜줬다. 우리 셋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별일 아닐 거라며 서로 위로하며 진료를 받았다. 나는 딸의 계획표에 맞춰 일곱 군데의 병원을 거쳐 9월 17일 인천 ㅅ병원에서 로봇수술을 시행했다. 설렘을 밀치고 들이닥친 두려움과 무서움에 나는 오른쪽 신장 절반을 내어줬다. 수술 후 5일 만에 퇴원했다. 일주일 뒤 나올 '조직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ㅅ병원 근처 요양병원으로 갔다. 7월 26일에 멈췄던 내 시간이 어느새 추석을 앞둔 9월 넷째 주가 되었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짧아진 내 머리카락이 춤을 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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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수첩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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