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생각한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by Book lilla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김이섭 옮김, 민음사>


수레바퀴 아래서를 처음 읽은 것은 4-5년 전에 상담연구회에서 교사들을 대상으로 인문고전 독서토론을 함께 하면서다. 책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선생님들에게 예시로 책을 제시하는 데 나도 모르게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라는 제목이 튀어나왔다. 헤르만 헤세의 다른 작품들 <데미안>, <유리알 유희>,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등은 읽어보았지만, 이 책은 읽어보지도 않았는데 왜 갑자기 이 책이 생각났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 책과의 운명적? 만남은 이렇다.

그때도 그랬지만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제목은 교사인 나에게 섬뜩하게 다가왔다. 다시 이 책을 꺼내게 된 것은 아들 둘이 이 책의 주인공과 비슷한 시기를 맞게 되면서 새삼 우리 교육을 생각해 보게 되면서이다. 이 소설이 1906년 독일에서 발표되었는데, 현 우리 교육과 너무나 닮아있다. 나라, 시대를 불문하고 교육은 우리 삶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밖에 없는 화두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독일의 작은 시골 마을 슈발츠 발트에 사는 한스 기벤 라트는 아버지, 마을 어른들, 학교 선생님들의 기대 속에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한다. 내성적인 한스는 신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중 자유롭게 시를 쓰던 하일러와 친해진다. 자유롭게 생활하던 하일러는 퇴학을 당하고, 홀로 괴로워하던 한스는 신경쇠약으로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으로 돌아와 시계 수리공 일을 하게 된 한스는 마을 사람들의 달라진 태도와 사랑하는 여인 엠마의 배신으로 힘들어한다. 어느 날 동료 수리공들과 술을 마신 뒤 술에 취해 돌아오던 중 물에 빠져 죽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든 생각 몇 가지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유학? 생활에 대한 단상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떠올랐던 것은 나의 중학교 시절이었다. 난 읍단위 사립중학교를 다녀었는데, 당시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은 인근 중소도시나 대도시로 유학을 떠났다. 나는 성적도 경제적인 형편도 되지 않았지만 괜히 분우기에 휩쓸려 '나도 한 번 가볼까?'하고 깝쭉거린? 경험이 생각났다.

나는 못 갔지만 한스처럼 성공을 꿈꾸면서 대도시로 나간 친구들이 꽤 있었던 것 같다. 소문에 예상대로 명문대를 간 친구도 있고, 적응하지 못해서 다시 돌아온 친구도 있다고 들었다. 지금은 특목고, 자사고로 유학?을 가고 있다.

물론 능력이 되고 학생 자신이 준비된 경우에는 더 큰 곳으로 가서 자신의 꿈을 키우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부모나 어른, 교사의 욕심이 아닌 학생 스스로가 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업에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지만 안정된 가정환경과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한스처럼 내성적인 친구들에게는 더더욱 그런 것 같다. 대도시로 가서 적응이 어려웠던 학생들에게는 아마 한스처럼 외로웠을 것이다. 현재에도 특목고나 자사고로 진학했다가 적응을 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한다.

92, 한스는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옆에 누워 있는 학우들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하나 건너 옆의 침대에서는 이상하리만치 겁에 질린 소리가 들려왔다. 한 아이가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쓴 채 울고 있었다.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이 나직한 흐느낌이 한스의 마음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았다. 그다지 향수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고향에 두고 온 작고 조용한 혼자만의 방이 그리워졌다. 게다가 새로운 미래에 대한 초조감과 주위의 많은 동료들에 대한 불안감이 그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93, 이제 이들은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기만 하면, 죽는 날까지 국가로부터 생계를 보장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선물이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위 인용글은 타향에서 학업의 어려움을, 아래 인용글은 국가에서 지원을 받고 학업을 할 경우의 부담감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수레바퀴 아래의 비참한 삶을 피하기 위해서는 타향서의 외로움과 주위 기대에 대한 부담감을 극복해야 한다.


13-14, 그의 담임교사는 가족의 평화에 둘러싸인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공부하면 특별한 깊이와 자극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부는 무엇보다 정서적 안정이 중요하다. 가정에서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부모님의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하다. 가정의 품과 고향에서의 추억을 잊지 못했던 한스는 어른들의 욕망으로 인해 결국 한스는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 무엇보다 따뜻한 가정과 정을 나누는 이웃, 추억을 함께한 고향의 친구들, 이를 아우를 수 있는 사회제도와 기성세대들의 인식이 중요하지 않을까? 지금도 낯선 타향에서 젊음을 불사르고 있는 수많은 청춘들이 부디 어른들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기를...


여전히 공부만이 살 길인가?

이 책의 메시지를 간단히 요약하면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의지를 짓밟는 제도와 교육에 대한 비판(표지글)'이다.

146, 교장선생님: 그럼. 그래야지. 아무튼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172-173, 학교와 아버지, 그리고 몇몇 선생들의 야비스러운 명예심이 연약한 어린 생명을 이처럼 무참하게 짓밟고 말았다는 사실을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왜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 시절에 매일 밤늦게 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는가? 왜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아 버리고, 라틴어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는가? 왜 낚시하러 가거나 시내를 거닐어보는 것조차 금지했는가? 왜 심신을 피곤하게 만들 뿐인 하찮은 명예심을 부추겨 그에게 저속하고 공허한 이상을 심어 주었는가? 왜 시험이 끝난 뒤에도 응당 쉬어야 할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는가? 이제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길가에 쓰러진 이 망아지는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의 현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우리 어른들의 욕심이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길가에 쓰러진 망아지'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전히 어른들은 '공부만이 살길이다'를 외치고 있고, 이를 강화하는 시스템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밤늦게 산책하다가 돌아올 때쯤이면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늦게 귀가하는 학생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여전히 공부를 안 해서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 공부가 너무 힘들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들을 뉴스에서 종종 마주하게 된다. 현대판 수레바퀴 아래서 이다.

우리 아이들이 수레바퀴에 짓눌리지 않는 삶을 살게 하려면 무엇보다 사회와 학교의 역할이 중요하다. 공부만이 아닌 아이들의 다양한 개성과 적성을 살릴 수 있는 시스템 을 구축해야 하지 않을까?


교사의 역할

본문의 글로 대신하며 나 스스로도 반성을 해본다.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의지를 짓밟는 교육'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는 나는, 우리 교사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71-72, 학교 선생들을 무정하다거나, 고루하다거나, 혹은 영혼조차 없는 속물이라고 욕하지 마라! 아, 그렇지 않다. 긴 세월에 걸쳐 아무런 성과 없이 자극에 무덤덤해져 버린 한 아이의 재능이 싹트기 시작할 때, 그 아이가 나무칼이나 돌팔매질이나 활쏘기와 같은 어리석은 놀이를 그만두고, 앞을 항하여 힘껏 발걸음을 내디딜 때, 멋대로 자라온, 통통한 뺨을 지닌 아이가 진지한 학습을 통하여 섬세하고, 진지한, 거의 금욕적인 아이로 탈바꿈할 때, 그 아이의 얼굴에 연륜과 학식이 더해 가고, 그의 눈망울이 목표를 향하여 더욱 깊어질 때, 그리고 그의 보드라운 손이 점점 더 희어질 때, 학교 선생의 영혼은 기쁨과 자랑에 겨워 활짝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학교 선생의 의무와 그가 국가로부터 받은 직무는 어린 소년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자연의 조야한 정력과 욕망을 길들임과 동시에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것이다. 또한 그 아이에게 국가적으로 공인된 절제의 평화로운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72, 소년의 내면에는 거칠고 야만적인 무질서의 요소가 숨어있다. 먼저 그것을 깨뜨려야 한다. 그것은 또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불꽃이다. 먼저 그것을 밟아 꺼버려야 한다. 자연이 만든 인간은 예측 불허의, 불투명한, 위험스러운 존재이다. 인간은 미지의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이며, 길도 질서도 없는 원시림이다. 원시림의 나무를 베고, 깨끗이 치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하듯이 학교 또한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을 깨부수고, 굴복시키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한다. 학교의 사명은 정부가 승인한 기본 원칙에 따라 인간을 사회의 유용한 일언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잠재된 개성들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육은 병영(兵營)에서의 주도면밀한 군기(軍紀)를 통하여 극도의 완성을 이루게 된다.


마치며

헤세가 살았던 시대와 오늘날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한스는 현재 우리 청소년들의 모습이다. 아니 우리 모두의 모습인 것 같다.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기성세대와 사회의 의지에 길들여질 때, 한스처럼 우리 모두 <수레바퀴 아래서>의 힘들고 비참한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한편으론 현재 우리는 몸부림치며 변화를 모색하고 있기도 하다. 가요, 드라마, 영화에서 한류의 열풍을 이끌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선진국의 반열에 들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헤세의 메시지를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간의 '고루하고 위선적인 권위'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상상과 자유를 마음껏 허함으로(물론 이에 따른 책임도 반드시 질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 필요) 의지를 상실한 체 수레바퀴에 깔려 사는 비참한 삶이 아니라 수레를 우리의 의지대로 끌고 나아가는 수레바퀴가 되도록 말이다.





이전 14화조금 더 나아지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