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와 효문제, 원앙, 조조 이야기
시이성인 방이불할,
염이불귀, 직이불사, 광이불요
是而聖人 方而不割,
廉而不劌, 直而不肆, 光而不燿.
"성인은 사방에 이르지만 가르지 않고,
청렴하지만 찌르지 않고, 곧지만 제멋대로 하지 않고, 빛나지만 요란하지 않다. "
(노자 58장)
나는 회사를 다니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상사와의 관계였다.
주로 상사의 부조리나 리더십 없는 행동을 보면 참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그런 조직 하에서 조직원들은 뒤에서 상사 험담을 하고 서로가 서로를 뒷담화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정말 못마땅했다. 대부분의 나의 시간을 보내고 내가 선택한 나의 소중한 직장이 이 정도밖에 않되는 것이 속상했고 상황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러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상사에게 이런저런 문제들을 아주 논리적으로 집어 말하고 옳은 소리들을 적어 메일을 보내곤 했다. 결과는 내 기대와는 달랐다. 어떤 긍정적인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만 결국 자괴감에 빠져 이직하곤 했다.
성실함으로 조직에서 받은 나름의 인정으로 나는 무모한 행동을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한번도 나의 직언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냥 옳은 소리니까 당연히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내가 얼마나 무지하고 지혜롭지 못한 것인지 나는 <한서> 고전을 읽으면서 알았다.
한나라 때 직언을 잘하여 명성을 얻었던 두 사람이 있었다. 원앙과 조조이다.
이들은 문경지치라 일컬어지는 효문제와 효경제 때의 신하들이다.
한번은 승상이 된 강후 주발에게 지나치게 예를 다하는 효문제의 모습을 보고 신하 원앙이 황제에게 그가 어떤 신하인지 물었다. 효문제는 강후 주발을 사직을 지키는 신하라고 하자, 원앙은 그 전에 강후 주발은 여씨들이 권력을 잡고 멋대로 할 때, 당시 태위로서 합당하게 황실의 기강을 다잡지 못했다며, 왕이 지나치게 겸양하니 그가 교만한 기색이 있다고 대놓고 조언을 했다. 이를 문제는 수긍했고, 승상 주발은 원앙을 원망했다. 하지만 얼마 후, 강후 주발이 모반을 했다는 투서가 있어, 소환되어 갇히게 되었을 때 그 누구도 승상 주발을 나서서 두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일하게 원앙만이 그가 죄가 없다고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이 일로 승상 주발은 물론, 효문제도 원앙의 그 강직함에 그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또, 효문제의 이복동생이었던 회남왕 유장의 모반 사실이 알려지자, 효문제는 그를 변방으로 이송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유장이 병사하자, 효문제는 크게 상심했다. 하지만 이런 일을 미리 예상하고 황제에게 동생을 포용할 것을 조언했던 원앙의 직언이 있었기에 황제는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한다. 또, 효문제가 신부인이라는 첩을 아껴 자주 곁에 앉히자, 원앙은 황후가 있으니 첩을 총애한다면 후사를 하는 방식으로 아끼라 직언하였다. 그러지 않으면 여태후와 척부인의 인간돼지와 같은 황실의 재앙이 또 있을 것이다라고 조언을 하자, 역시 문제는 기뻐하면 신부인에게 금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처럼 바른 직언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진 않는 신하와 이를 잘 이해하고 포용하는 황제가 있었다. 아름답다.
이에 <한서>에서는 “원앙이 자주 직간을 하였기에 중앙에 오래 근무할 수 없었다.” (한서 3 p.426)라고 전한다. 이렇게 효문제는 원앙을 신뢰하였지만 다른 신하들과의 관계도 염려했던 왕은 그를 제의 승상, 오의 승상 등 지방으로 보내 그를 적절하게 관리했다. 이에 원앙도 지방에 내려가서는 지방 제후 왕들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자주 술만 마시는 것처럼 행실하며 교만하지 않게 보이려 했다. 이렇게 정치를 했다.
효문제에게는 다른 직간하는 신하가 또 있었다. 그는 조조라는 인물로 당시 한나라의 여러 문제를 깊이 있게 분석하고 개혁안을 제안했던 아주 명석한 신하였다. 그는 제후들의 그릇된 행실을 보고 제후의 영지를 과감하게 삭지할 것을 건의했고, 흉노와의 관계도 철저히 준비하고 전략을 짜서 한나라의 힘을 보여줄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효문제는 그의 학문의 깊이와 논리에 긍정을 하면서도, 그것을 다 실행하지 못하는 부족한 자신을 이해해달라며 신하에게 겸양했다. 그러면서 조조의 개혁안 중에서 다소 가벼운 것은 적절히 실행했다. 예를 들어 변방에 자주 출몰하여 괴롭히던 흉노족을 대비하는 방책으로 국가가 먼저 그 경계지역에 집을 짓고 농기구를 갖추고, 징역을 면제하고 노역을 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살게 하고 백성들 중에 이주를 원하는 사람을 모집해서 그 지역에 살게 하고, 국가가 살기 좋게 지원하며 흉노가 쳐들어왔을 때 자체적으로 서로 그 노략질을 방어하고 적절하게 보상했다. 이처럼 조조와 같은 개혁적이고 똑똑한 신하의 직언을 효문제는 적절히 조율하며 관리하는 방식으로 대했다.
이렇게 효문제는 직간하는 신하들을 직언을 잘 검토하고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신하들 간의 힘의 균형도 이뤄나간 것이다. 노자 58장에 “시이성인 방이불할”이라 성인은 서로 가르지 않는다 한다. 문경지치를 이룬 효문제는 황노사상를 신봉하던 어머니 두태후의 영향이였던지 노자의 ‘방이불할’을 떠오르게 한다. 어질고 바르게 황실의 권위를 세워나가려 했던 강직한 신하와 한나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주장했던 비슷한 듯 다른 바른 신하들 사이에게 효문제는 그들을 가르고, 한 사람을 더 편애하며 싸우게 하지 않았다. 효문제는 모두의 의견을 열심히 경청하고 적절하게 수용하면서 그들을 조율했다.
하지만 효문제의 아들 효경제가 즉위하면서, 한나라 최대 위기라는 오초7국의 난이라는 사단이 발생한다.
왜 이런 위기가 발생한 것인가? 노자 58장 “염이불귀, 직이불사, 광이불요”라는 말이 있다. 청렴하나 찌르지 않고, 곧되 멋대로 하지 않고, 빛나지만 요란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 말을 조조가 숙고했다면 어땠을까? 효경제가 즉위하자 개혁적이고 똑똑한 조조를 어사대부로 승진시켰고 그의 주청대로 법령도 많이 개정했다. 선왕의 정치를 따라서 문경지치를 이뤘다고 일컬어 지는 효경제의 정치를 좀 더 들여다보면 사실 ‘방이불할’을 행했던 선왕과 달랐다. 그런 효경제의 비호 아래 조조는 평소 자신과 대립각이였던 원앙을 마치 ‘날카로운 칼로 찌르듯’ 먼저 공격했다. 원앙이 오왕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는지 왕이 의심하게 하고 결국 서인으로 강등시킨다. 그리고 조조는 황제를 위해 제후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제후들의 영지를 삭감하는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하자 제후들의 반항이 극심했다. 그래서 결국 오나라와 초나라를 비롯해 주변 여러 제후국들이 모의해 황실을 공격하기 위해 서쪽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효경제는 당황했고, 궁지에 몰렸던 원앙은 그 혼란의 틈에 자신을 궁지에 몰은 조조를 반란의 희생양으로 삼아 제후들의 난을 잠재울 것을 몰래 간했다. 이에 어리석게도 효경제는 자신과 조정을 위해 직언을 하던 아끼던 신하인 조조를 결국에 죽이라 스스로 명하고, 조조는 영문도 모른 채 조복을 입은 채 끌려가 성밖에서 처형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의 장면이다.
반고는 <한서>에서 조조의 나라와 황제를 위한 충성스런 여러 계책들을 기록에 남기며 그의 죽음을 애석했다. 원앙 또한 몇 년이 지나 효양왕(유무)의 후사를 세우는 문제에 대해 경제에게 직언을 하자 이를 양왕은 원망하여 자객을 보내 길거리에서 원앙을 칼에 찔러 죽인다.
직언하던 신하들의 결말이 이렇다. '어이없게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어질은 황제 효문제 아래에서는 원앙과 조조는 적절하게 견제하며 간언을 했고, 그 힘은 균형을 이루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는 왕 아래에서는 누군가는 교만하게 되고 날카로운 칼로 상대방을 공격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 상대방은 자신이 살기 위해 또 상대를 찌른다. 결국 자신이 누군가를 찌른 칼이 자신을 찌르게 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직언할 용기가 있고 능력 있는 신하가 ‘상대를 찌르지 않고’, ‘요란하지 않게 빛나기’ 위해서는 ‘방이불할’하며 균형을 잡을 줄 알고 가르지 않는 존재가 있을 때 가능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