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박을 주는 환경을 너무나 힘들어하는 내가 성인이 되어 행복했던 것 중 하나는 입시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것이었다. 주어진 기간 주어진 날짜에 목표를 최대한 달성하기 위해 나 자신을 과도히 불태우면서 많이 지쳤었다. 긴장 탓인지 본 실력보다 수능이 잘 나오지 않았지만 다시 수험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재수 없이 바로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교에 입학해 주어진 자유 아래 해보고 싶은 것들을 해보았다. 점수를 위해 공부하던 생활을 뒤로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만남, 동아리 활동, 대외 활동, 배우고 싶던 학과 과목.. 등등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나에게 집중하며 나라는 존재를 알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주체적으로 살아간다고 느꼈고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착각했다.
그것도 잠시, 새로움은 사라지고 남은 건 또다시 다람쥐 쳇바퀴 굴리는 듯한 일상이었다. 시시콜콜하지만 여유로운 시간을 조금 보내고 나면 다시 과제와 시험에 절어있었고 이후 잠깐의 여유, 그리고 과제, 시험 방학… 일상의 반복 안에서 꽤나 열심히 살았었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 어엿한 사회인이 되기 위해 몸부림 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흘렀고 3학년이 끝나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 대학 생활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학생으로 보내는 시간을 먼 미래의 관점에서 바라보니 너무나 하찮았다. 좀 더 근본적으로, 무엇을 위해 노력하고 움직이는지 알 수 없었다.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느낄 수 있는 건 답답함과 분노뿐이었다. 소소한 기쁨들도 분명 있었지만 그러한 감정은 마치 바람처럼 느끼려고 하면 금방 사라져 버렸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더 큰 의미와 원동력이 없었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3학년을 끝내고 휴학을 신청했다. 더 이상 학교 생활에 집중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삶에서 큰 질문을 맞닥뜨릴 면 어디론가 훌쩍 모험을 떠나곤 한다. 좀 더 가볍게 말하면 여행을 떠난달까. 나 역시 한국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정확히는 떠나는 것 말고 무엇을 해야 거대한 물음에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여행이 답을 줄 수 있다는 기대는 거의 없었지만 오히려 그 생각이 오류기일 기대하고 싶었던 것 같다.
1학년때부터 모아 온 적금을 깨서 예산을 마련했다. 턱없이 부족한 예산으로 세계 여행이 가능한 걸까 걱정스러웠다. 물가가 비싼 나라에서는 카우치서핑을 하고 음식을 직접 해 먹어야 했다. 얼마나 오래 여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오래 버텨보기로 했다.
어떠한 경로로 여행을 할지 많이 고민하다가 정보를 찾아보던 중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대해 알게 되었다. 보자마자 이거다 싶었다. 광활한 대륙을 가로지른다는 그 자체가 멋있었고, 그렇게 나의 첫 여행지는 블라디보스톡이 되었다. 그곳에서 열차를 타고 이르쿠츠쿠,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는 여정을 계획했다. 마지막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로 건너가는 일정을 세우고 보니, 약 한 달 정도가 소요될 것 같았다. 그 뒤부턴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일일이 모든 일정을 계획하고 여행하는 건 모험을 계획한 목적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찾아보니, 한국 국적기와 러시아 항공사 비행기가 있었다. 러시아 항공사의 비행기표가 더 저렴했지만 저녁 늦게 도착하는 비행기였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 막차를 탈 수 있을랑 말랑한 시간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돈을 아끼기 위해 러시아 항공사 표를 예매했다.
한국을 떠난 날을 기억한다. 16년 10월 3일이었다. 짐은 많이 챙기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그때그때 현지에서 구입하기로 하고 여름, 겨울 옷 두 벌씩, 경량패딩, 기모 후드집업, 비상약, 세안도구 정도만 챙겼다. 짐이 될까 노트북과 카메라는 두고 갈까 하다가 기록을 위해 챙겼다. 배낭에 모든 짐을 다 넣으려다가 내 어깨로 모든 짐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캐리어에 짐을 나눠 넣었다. 소매치기가 걱정되어 배낭엔 자물쇠를 이중으로 걸었다. 떠나는 날 아침까지도 빠뜨린 물품들을 챙기면서 정신없었던 것 같다.
공항까지는 엄마와 함께했다. 보안 검색을 하러 들어가면서 엄마랑 헤어지고 나니 혼자 남겨진 상황이 더 실감 났다. 엄마는 나를 보내고 난 뒤 많이 우셨다고 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마음이 아리다. 부모님께선 여행을 많이 반대하셨는데 학업을 빨리 마치기 원하기도 하셨고, 무엇보다 신변에 위험이 생길까 많이 걱정하셨다. 말리고 싶지만 붙잡을 수 없는 마음... 감히 내가 다 알 수 있을까.
복잡한 마음을 애써 묻어두고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