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PE Aug 11. 2024

3. 러시아

3-2. 블라디보스톡

전날 늦게 잠들었는데 사모님과 만나기 위해 일찍 일어나려니 피곤했다. 지난밤 도착했을 때도 도미토리 룸메이트들은 잠들어 있었는데 오늘 역시 이른 시간에 일어나다 보니 다들 잠들어 있었다. 조용히 씻으러 갔다. 샤워실 물이 따뜻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어젯밤 대충 풀어놓은 캐리어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꺼내 입고 문을 나섰다.


카페는 숙소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아르밧 거리에 있었다. 카페 이름은 세븐어클락.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다. 카페 앞에서 조금 기다리니 현지인들 속에 한 한국인 여성분이 나타나셨고 보자마자 사모님이시구나 알아챘다. 사모님께선 아침이라며 차와 빵을 사주셨다. 음식을 먹으며 그분께 러시아 생활은 어떠시냐고 여쭤봤다.


"러시아에 있긴 하지만 한국의 삶과 다를 건 없지. 한국에서도 늘 비슷하게 사는 것처럼 러시아라고 다를 건 없어. 오히려 한국이 아니니까 만날 수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 적어 많이 외롭고 지루하기도 하지. 그렇지만 외로움, 지루함을 버텨내는 게 삶이 아니겠어"


권태로움. 삶을 살아가면서 계속 만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시기. 처음에 새로웠던 일들도 필연적으로 익숙함을 만나면서 권태에 접어들게 된다. 비단 일뿐만 아니라 관계에서도 권태의 시기는 빠지지 않는다.

여행을 떠나게 된 이유 역시 한국에서의 권태로움을 버티지 못해서이지 않을까. 처음에 새로웠던 대학교 생활도 결국엔 잡히지 않는 미래를 위한 의미 없는 반복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생활은 직장을 들어가도 난 후에도 별반 다를 거 같지 않았다. 잠시만 그렇다면 이겨내겠는데 기약 없이 존재할 것 같은 숨 막히는 권태로움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지 몰라서 마음이 무너졌었다. 그래서 도피 같기도 한, 흔히들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여행을 떠났다. 무의미한 반복이 정말 앞으로 삶의 전부인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사모님께서 해주신 말을 들으니 지루함과 권태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여행 2일 차에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게 좀 웃기기도 하지만, 여행으로 삶이 달라지지는 않겠구나 생각도 했다. 이미 결론은 정해진 것일까?



그래도.. 그래도 당장 판단해 버리긴....... 무언가 있을 수 있으니깐.



아침을 먹고 사모님과 함께 해변가를 산책했다. 아직 시간이 일러 우리가 나온 카페 외에는 문을 연 곳이 없었다. 블라디보스톡은 번화한 관광지라고 하긴 어려운 곳이었다. 눈을 사로잡는 건물이나 자연은 없지만 유럽 느낌을 내는 이국적인 스타일의 건물들을 보며 어렴풋이 타국임을 인지했다.



점심 무렵이 되자 가게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고 몇 가게에 들어가 괜찮은 겨울 외투가 있나 둘러보았다. 앞으로 맞이할 겨울을 나기엔 얇은 경량패딩과 기모 후드집업만으론 턱없이 부족할 것 같았다. 괜찮은 겨울 옷을 발견했으나 다시 내려놓았다. 초반부터 돈을 쓰는 게 부담이었다.

 


오후엔 선교사님도 합류하셨다. 관광 코스 중 하나인 독수리 전망대에 올랐고 그 후엔 선교사님 부부와 헤어졌다. 작별하기 전에 선교사님께서 혹시 한국에 돌아가 여행 일지를 쓰게 된다면 자기 이름을 넣어달라고 말씀하셨는데, 8년 만에 부탁을 들어드리게 되었다. 그때 쓰던 핸드폰 - 신기하게도 아직 있어서 다행이다. 이 날을 위해 버리지 않았던 건가ㅋㅋㅋ - 메모장에서 선교사님 성함을 발견했다. 이영훈 선교사님이셨다. 모험을 시작하기 두려웠던 내게 용기를 베풀어 주신 고마운 분. 선교사님과 사모님의 호의를 통해 여행을 시작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전 03화 3. 러시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