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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PE Aug 19. 2024

3. 러시아

3-3. 횡단열차를 타고

기차를 타고 광활한 대륙을 가로지른다는건 상상만 해도 멋졌다. 이번엔 중간에 이르쿠츠쿠에 내려 바이칼 호수를 보기 때문에 3일만 열차를 타면 됐다. 3일 동안 노 샤워다!


3등석은 한 방에 - 방이라고 해봤자 문도 커튼도 없이 다 뚫려 있려 있는 말로만 방일 뿐이지만 - 4명이서 이층 침대 두 개를 나눠 쓰게 되는데, 사람들은 주로 아래칸을 선호한다. 나는 아랫칸에 탔던 것 같다. 아래칸에서 창 밖 풍경을 내다본 기억, 윗 층 사람이 왔다 갔다 한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한분은 나와 같이 타셨는데 직업이 요리사였다. 요리사답게 그의 짐에는 먹을 것이 가득했다. 횡단열차에서 라면과 빵만 먹을 생각을 했는데 그의 짐에서 나온 햄 치즈 고기 등의 식량 덕분에 풍족하게 먹었다. 나머지 두 명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조금 떨어진 하바롭스크에서 탔고 둘 다 연어 잡이 어부라 했다. 연어 수확철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열차를 탔다고 했다. 연어잡이 어부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그들은 핸드폰에서 그들이 잡은 연어사진도 보여주고 가족사진도 보여줬다. 그중 중 한 명의 이름은 미카엘이었다.

 

횡단열차는 자주 정거장에 섰고 짧게는 몇 분 길게는 몇 시간 동안 정차하게 되는데, 길게 정차할 때마다 갑갑한 몸을 풀기 위해 정거장을 산책했다. 컴컴한 밤 역에는 무리 지어 연초를 피는 러시아 아저씨들이 많았다. 혼자 온 낯선 외국인인 내가 지나가면 힐끗 쳐다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래도 용감하게 순찰(?)을 돌았다.


"뭐 하러 나온 거야?"


누군가 부르길래 뒤돌아보니 미카엘이 있었다. 혼자 가면 혹시 위험할 수 있을까 봐 따라온 것이라 했다. 그러곤 배고프지 않냐며 슈퍼에 데려가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혹시 미카엘이 다른 이유가 있어 잘해주는 것인지 경계했지만 아닌 척했다. 기차로 돌아와 쉬고 있는데 미카엘이 번역기에 긴 글을 쓰더니 건네주었다.




'나는 원래 범죄자였습니다. 몇 년 전 감옥에 수감되었었는데 그때 신을 만나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앞으로는 선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가 선한 사람인 것 같기는 했다. 다만 갑자기 만난 사람이고 이유 없이 친절을 베풀 때는 의심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비록 사실인지 알 수 없어도 그의 말은 내 마음에 감동을 주었다. 나를 챙겨주었던 이면엔 좀 더 깊은 이유가 있었구나. 내면에 강력한 동기가 있는 사람의 행동은 믿을 수 있지 않나 싶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180도 바뀐 사람들은 내가 감히 판단하지 못할 정도의 확신으로 살아가지 않을까...




4일간 열차 안 사람들에게 기초 러시아어를 배우기도 하고,  대충 눈치로 규칙도 제대로 모르는 카드게임도 했다. 다른 칸에 있는 어떤 사람이 나한테 관심 있는 거 같다고 놀림받기도 했고 정거장에 나가 함께 산책도 하기도 했는데, 그 시간 동안 정이 많이 들었다.



이따금 열차 창밖에 펼쳐지는 끝없는 우랄산맥을 보며 기초 러시아어조차 구사하지 못하는 지금의 상태가 말 못 하는 아이와 같다고 느꼈다. 누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나약함과 취약 함한 상태는 사실 불편한 건데, 이상하게도 오히려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일련의 사건들에서 파생된 걱정, 두려움, 기쁨, 감사.. 모든 감정들을 생생하게 그 자체로 느낄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정체 모를 안개 같은 답답함 속에 갇혀 분노밖에 느끼지 못했는데 말이다. 사실 한국에서 그렇게 힘든 상황에 있던 게 아니었을까라고 잠깐 생각했다. 왜 긴 시간 동안 무기력함과 공허함의 늪에 빠져 있었을까.




바이칼 호수에 가려면 이르쿠츠크역에서 트램을 타고 중앙시장으로 가야 했다. 그곳에서 다시 봉고차를 타고 알혼 섬이라는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야 했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함께 내린 어부 룸메이트가 데려다주었다. 행운을 빈다고 말하며 가족에게 돌아가는 그를 보는데 뭔가 씁쓸했다. 나도 가족이 있는데 말이다. 안락함을 두고 스스로 떨어져 나왔다.


새벽녘 트램 안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너무 고요해서 트램이 철로에 부딪혀 나는 마찰소리가 크게 들렸다. 트램을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전광판에 역 이름이 나오지만 러시아어라 제대로 읽을 수 없었고 철길 소리에 안내 방송도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충 중앙시작 역이라고 쓰인 것 같고, 마침 주변도 시장인 듯한 곳에서 일단 내렸다. 캐리어를 끌고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갑자기 옆에서 봉고차가 멈추어 섰다. 나보고 어딜가냐며 자기가 태워줄 수 있다고 했다. 바이칼 호수에 간다고 하고 일단 그의 차에 탔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몇 루블이라고 했다. 좀 비싼 것 같지만 가는 거리에 비해 저렴한 듯했다. 그런데 분명 봉고차를 타고 4-5시간을 가야 하는 거리를 승객 혼자만 태우고 가는 게 이상해 다시 기사분께 물었다.


"알혼, 오케이?"


몇 번 어디냐고 다시 물어보길래 지도에서 알혼섬을 보여줬다. 그의 눈의 휘둥그레지더니 노노 하면서 차를 돌렸다. 어느 식당 앞에서 멈추더니 여기에서 사람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바로 내리라고 안 하고 식당까지 데려다준 게 고마웠는데 갑자기 손을 내밀더니 택시비를 청구했다. 그럼 그렇지.


미니밴이 출발할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 시간 동안 정말 미니밴을 탈 수 있는지 수없이 의심했다. 나중엔 의심을 하는 것조차 놓아버렸다. 몇 시간쯤 지났을까 누가 식당 안으로 들어와서 알혼섬 갈 사람은 밴을 타라고 했다. 밴을 타고 마지막으로 배를 타고 들어가면 드디어 도착이다.




이만큼 달리고 달려왔는데도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다니. 러시아는 참 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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