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4일, 오늘 여의도 공원 문화광장에서 불패마라톤 대회가 열립니다.
마라톤 대회 참가가 벌써 다섯 번 째이지만 항상 긴장이 됩니다. 이번에는 며칠 전부터 부담이 되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앉으니 꼭 가야 되나 하는 게으른 생각이 발동했습니다. 어쨌거나 참가비를 내고 번호표에 티셔츠까지 받았으니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밥을 간단히 먹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습니다. 책장 한쪽에 마라톤 참가를 위한 코너를 만들어 놓고 그곳에 모든 옷이며 신발을 놔두었으니 자동으로 차려입고 집을 나섭니다.
이번에는 지난번 마라톤 대회 때 보았던 학생처럼 번호표만 챙겨서 나왔습니다. 평소 같으면 가방에 우산도 넣고 물통도 넣고 허전하면 책도 한 권 넣어서 다니는데, 이번에는 과감히 집에 두고 나왔습니다. 가방이 없으니 등이 허전합니다. 지금은 오직 마라톤만을 위한 외출입니다. 가방 없이 걷다 보니 오히려 자유롭고 해방감을 느낍니다. 짧은 거리지만 지하철 역까지 마라톤 연습을 해봅니다.
뛰다 보니 바람이 시원합니다. 온도를 재보니 9도, 완전한 봄날씨입니다. 대회장으로 가면서 계획을 세웁니다. 이번 마라톤은 속도와 시간을 생각하지 말 것, 그리고 쉬지 않고 달릴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앞으로 10km를 달리려면 무엇보다도 뛰다가 걷는 습관을 고쳐야 겠습니다. 일단 뛰기 시작하면 계속 뛰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그것이 가능할까 걱정이 앞서지만 오늘의 목표입니다.
여의도 역에 도착해서 화장실에 들렀다가 3번 출구를 나왔습니다. 몇 년 만에 여의도에 왔는데 고층건물이 많아졌습니다. 사진으로 보던 뉴욕 맨해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로를 건너는데 택시며 버스들이 너무 많습니다. 언뜻 보아 30여 대는 달리고 있고 20여 대는 주차해 있습니다. 매연이 걱정됩니다.
대회장으로 가니 9시 10분 전입니다. 대회 안내문자에는 8시까지 오라고 했는데 많이 늦었습니다. 5km는 맨 나중에 뛰니 시간은 충분합니다. 여러번 참가하다보니 늦었어도 마음이 태연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왔는지 호기심도 사라졌습니다. 여기저기 둘러보지도 않아도 마라톤 대회장 구조는 뻔하니 무엇을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온도를 봤습니다. 13도로 올랐습니다. 보관 비닐을 받아 들고 탈의실에 들어가 바지와 잠바를 벗어 거기에 넣었습니다. 물건을 보관하고 나오는데 하프 마라톤 뛰는 사람들이 출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조그만 광장에 참가자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외국인도 눈에 띕니다. 한국사람같은 외국인도 있고, 외국사람 같은 한국인도 있습니다. 아이들도 많고 가족끼리 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람 숫자가 많으니 하프 A팀, B팀으로 나누어 출발선으로 갑니다. 10km도 두 팀으로 나누었습니다. 문득 초등학교 때 조회 준비할 때 생각이 났습니다. 운동장에서 반별로 학년별로 줄 서서 연단 앞으로 나가던 그 때의 분위기입니다. 안내요원에게 물으니 오늘 전체 참가자는 3,400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때도 한 반에 100명 정도, 10개 반에 1천 명, 그리고 1, 2, 3학년이 모이면 3천 명 정도 되었으니 그때와 비슷합니다.
사람들 위로 멀리 하늘에 드론이 날고 있습니다. 대회 본부에서 띄운 드론일까? 사람들 머리 위를 한 바퀴 돌더니 멀리 하늘로 올라갑니다. 하늘에는 새털을 깔아놓은 듯한 구름이 펼쳐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 드론을 조작하고 있을까? 저 고층 건물에서 띄운 것일까? 아니면 저 구름 너머 어떤 행성의 외계인이 보낸 UFO일까? 저기에 총이나 포탄이 장착되어 있으면?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드론이 미끄러지듯 내려옵니다. 그리고 지금 막 출발하는 하프팀을 쫓아갑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출발선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드론 앞에 카메라가 달려있습니다. 세상은 참 새로운 것들이 잘도 나옵니다.
10km 팀이 출발하고 5km 팀도 출발선으로 가고 있습니다. 장내 아나운서는 5km 뛰는 사람들이 현명하다고 합니다. 건강 달리기를 하는 현명한 사람들이 5km 뛰는 사람들이라고 추켜줍니다. "실력이 없어서 5km 뛰는데요. 5km, 10km, 하프 중에서 선택지가 그것밖에 없으니 선택한 것이지요. 하프 뛸 줄 아면 누가 5km를 뛰나요?" 인터뷰 기회가 오면 그렇게 답을 하고 싶었는데 어느덧 출발 시간입니다.
9시 18분에 출발했습니다. 시간을 보지 않고 기록을 재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시계를 쳐다봤습니다. 날씨가 포근해지니 반바지 차림으로 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회 본부에서 보내준 회색의 반팔 티셔츠를 입은 사람도 많습니다. 저는 혹시 추울까 봐 긴팔 티셔츠를 입었습니다. 다음에는 반팔을 입어야겠습니다. 이번에는 남의 뒤도 따라가지 않고 제 페이스로 천천히 뜁니다. 지난번에는 쿵쾅쿵쾅 뛰었는데, 이번에는 살금살금, 사뿐사뿐 뜁니다. 힘을 쓰지 않고 절대로 속도를 내지 않고 달립니다. 만약에 지치면 걸어야 하니 지치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전에는 시작할 때 빈 공간이 보이면 빨리 빠져나가려고 부지런히 달렸는데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고 꾸준히, 천천히 달립니다.
여의도 문화 마당을 벗어나 좁은 길로 들어섭니다. 앞에서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가 걷고 있습니다. 아니 벌써 걸으시면 어떡하지? 하고 뛰면서 돌아보는데 배번호가 없습니다. 한강으로 산보 나가는 주민인 모양입니다. 우리도 컴컴한 굴다리를 통과해서 한강변으로 나갑니다. 살짝 부는 강바람이 시원합니다. 매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파란 물이 넓게, 멀리까지 펼쳐져 있습니다. 앞서 달리는 어떤 엄마가 아이에게 말합니다. "몸에 힘을 빼고 달려." 그렇지요. 저도 힘을 빼고 달려야겠습니다. 힘이 들어가면 사뿐사뿐이 아니라 쿵쾅쿵쾅 뛰게 됩니다. 살금살금, 슬금슬금, 사뿐사뿐 한참을 달립니다.
지친 생각이 들면 다리는 그대로 달리게 놔두고 대신 호흡을 챙깁니다. 입으로 코로 최대한 신선한 공기를 많이 들이마시고 내쉽니다. 머리로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눈은 바로 앞의 땅만 보고 달립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 욕심이 생깁니다. 빠르게 달리는 사람을 보면 빨리 달리고 싶고, 걷고 있는 사람을 보면 걷고 싶습니다. 그러니 아예 땅만 보고 달립니다.
그런데 벌써 반환점을 돌아서 뛰어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른 시계를 봅니다. 12분이 경과했습니다. 굉장한 속도입니다. 그러면 저 사람은 5km를 24분 만에 골인하겠습니다. 조금 더 가니 돌아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어떤 사람은 컵을 들고 옵니다. 벌써 반환점인 모양입니다. 그동안 쉬지 않고 달렸으니 반환점에서는 물을 마시면서 조금 걸어야겠습니다. 드디어 물 마시는 곳이 보이고 반환점은 좀 더 가야 합니다. 반환점에 왔습니다. 시계를 보니 36분입니다. 18분 걸렸습니다. 물을 마시면서 조금 걷다가 다시 뜁니다.
18분이면 지난 번 보다 늦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한 번도 걷지 않았으니 목표는 반 정도 달성했습니다. 이제 앞으로 골인 지점까지 걷지 않고 계속 달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다리가 조금씩 쳐집니다. 초등학생 둘이 잽싸게 달려 나갑니다. 아이들을 따라 달리다가는 엉망이 될 수 있습니다. 먼 곳을 봅니다. 한강 변으로 하얀 꽃들이 만발했습니다. 그 꽃을 보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향기가 좋다고 외칩니다. 향기를 맡을 시간이 없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했으나 그러려면 걸어야 하니 포기합니다. 계속 달립니다. 계속 달리는 습관을 들여야 10km 도전이 가능합니다. 오늘은 무조건 계속 계속 달리는 훈련입니다.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자세를 바로 잡습니다. 사뿐사뿐 달리고 있는지, 살금살금 제 페이스대를 유지하고 있는지 점검합니다. 손바닥을 펴봅니다. 비록 100m 달리는 자세는 못 취하지만 손바닥만이라도 죽 펴고 날렵하게 폼을 잡습니다. 어렸을 때 100m 달리기 선수였던 친구의 손바닥을 흉내 내봅니다. 그러면서 바람을 손바닥으로 가르고 달립니다. 그러고 보니 손바닥에서 열기가 빠져나가 온몸이 시원해진 느낌입니다. 날이 더워지니 몸의 열기라도 빼내야 조금이라도 편하게 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호흡을 부지런히 하면서 다리가 지치지 않게 합니다.
한참을 달렸는데 얼마나 남은지 모르겠습니다. 도로 한쪽으로 가서 파란색의 차선만을 보고 뛰어갑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않고 다리 상황만 관심을 둡니다. 다리가 지치면 안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길을 막아섭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안내원입니다. 이길로 계속 가면 10km 코스라고 합니다. 하마터면 10km 코스를 뛸 뻔했습니다. 5km는 참가비가 35,000원인데 10km는 40,000원입니다. 10km 뛰고 나서 5천 원을 더 내면 되지만 공짜로 뛰어라고 해도 못합니다. 5km도 지금 목숨을 걸고 뛰는 형편입니다.
드디어 굴다리 밑까지 왔습니다. 컴컴한 길을 통과해 언덕길을 뛰어올라갑니다. 걷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걸으면 안 되니 최대한 버티면서 올라갑니다. 이제 150m쯤 남았을까? 손바닥을 펴고 달리는 김에 100m 속도로 달릴 준비를 합니다. 그동안 조심히 달렸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쓸 수 있는 힘은 남아 있습니다. 상체를 눕히고 속도를 높여봅니다. 손바닥을 날렵하게 펴고 몸을 앞으로 더 숙이고 빨리 달리기를 시작합니다. 이제부터는 골인 지점까지 100m 달리기입니다. 그런데 하체는 잘 따라주지 않습니다. 하체도 날렵하게 뛰어야 하는데 힘이 풀려서 인지 두 발이 멋대로 지그재그입니다. 그래도 최대한 100m 뛰기 자세를 유지하면서 뜁니다.
연도에는 이미 들어온 많은 선수들이 서 있습니다. 갑자기 창피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늦게 들어오면서 마지막 스퍼트라니, 하하하, 우습기도 하지만 그래도 부지런히 뛰면서 골인지점을 통과합니다. 뒤에서 어떤 사람이 박수를 쳐줍니다. 시계를 보니 55분입니다. 후반은 19분 걸렸습니다. 전반은 18분이었으니 총 37분 걸렸습니다. 지난번 보다 3분 정도 늦게 들어왔으나 중요한 것은 이번에는 쉬지 않고 계속 뛰었다는 점입니다. 반환점과 길 안내를 받을 때 외에는 한 번도 걷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끝판 힘내기까지 시도해 봤으니 성공한 마라톤입니다. 집에 돌아가면 다음번 마라톤 등록을 또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