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갑자기 숙제를 받았습니다. 한 달쯤 뒤에 '시대를 앞서간 최제우'에 대해서 발표를 하기로 했습니다. 석사 논문으로 동학과 관련된 논문을 쓰고 그 뒤에 최제우와 관련된 글을 몇 편 쓴 적이 있습니다. 최제우( 1824~1864)는 동학을 창시한 사상가입니다. 그의 동학은 나중에 천도교가 되고 삼일독립운동을 주도한 세력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과제를 받아 여기에서 미리 초고를 써봅니다.
시대를 앞서간 최제우? 최제우는 어떤 점에서 시대를 앞서갔을까? 이것저것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어떤 이유로 시대를 앞서 간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평소에 논문을 쓸 때는 최제우 앞에 '동학 창시자'라는 이름을 꼬박꼬박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을 설명할 때는 그가 36세쯤 되었을 때, 즉 1860년 4월 5일(음력)에 경험한 종교체험, 말하자면 신비체험 이야기를 함께 연결 지어 논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동학 창시자'라는 타이틀도 떼고 그가 겪은 종교체험도 제거하고 생각해 봅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 최제우를 염두에 두고 작성해 봅니다.
동학은 1910년대에는 교인이 300만 명에 가까울 정도로 교세가 컸습니다. 당시는 손병희(1861~1922)가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동학 교단을 이끌었습니다. 지금 천도교 교인들은 그 숫자가 몇 만 명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종교가의 측면에서 보면 최제우의 존재감은 한없이 작아집니다. 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를 벗어나서 그를 평가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이하 10가지 점을 살펴봅니다.
개벽(開闢)이란 세상이 시작되는 것을 말합니다. 개(開)는 열다, 시작하다는 뜻이고, 벽(闢)은 열다는 뜻으로, 개벽은 세상이 새롭게 열리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이 시작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늘과 땅이 구분되어 열리고 그 사이에 온갖 생물들이 생겨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뜻이 확대되어 새로운 미래가 열리다, 황무지와 같이 미개발된 어떤 분야를 새롭게 개척했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말엽에 최제우가 처음으로 이 단어를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이후에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많은 신종교 종파들이 이러한 개벽 개념을 채용하여 핵심교리로 삼았습니다. 최제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
태평성세 다시정해 국태민안 할것이니
개탄지심 두지말고 차차차차 지냈어라
하원갑 지내거든 상원갑 호시절에
만고없는 무극대도 이 세상에 날것이니"(「몽중노소문답가」)
최제우는 자기 시대가 '다시 개벽'되는 시대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온갖 전염병이 돌고, 중국은 서양 세력에 의해서 곧 망하게 생겼고, 일본은 남쪽에서 쳐들어올 것 같고, 국내는 민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그러니 이 세상을 곧 망할 것이고, 그 뒤에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이런 선언은 매우 종교적인 입장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자신이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았으며 자신에 제창하는 무극대도인 동학사상이 이 세상에 선포됨으로써 세상은 다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적인 입장을 벗어나더라도 최제우 시대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중국의 힘이 약해지고 서양이 그것을 대체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지배적인 종교였던 유교를 대신해서 기독교가 힘을 발휘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전혀 이질적인 서양의 학문과 과학기술이 유학을 대신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최제우는 이런 변혁기에 살면서 자기 시대가 커다란 변혁의 시대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선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시대의 변화를 주도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시대를 앞서간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근대의 시작은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① 1863년 고종의 집권, ②1876년 개항(김경태, 조기준, 서중석, 이윤상 설) ③ 1894년의 갑오개혁(도면회 설) 등입니다. 대개는 이때부터 대한민국이 설립된 1948년까지를 근대로 봅니다. 이후는 현대입니다.
①번 설에 따르면 우리나라 근대는 흥선대원군의 섭정기간과 고종의 직접 집권 시기, 그리고 일제 식민지 시대가 포함된 기간 약 85년간입니다. ②번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뒤 개항하여 일본에 합방된 기간까지 약 72년 간이 우리나라 근대입니다. 요즘 역사학자들은 대개 이 설을 따릅니다. ③번은 일본군이 동학농민운동을 핑계로 한반도에 들어와 청군을 제압하고 친일 내각인 김홍집 내각을 통해서 조종한 갑오개혁 이후 54년 간입니다.
위와 같은 시대구분 외에도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한 시점을 우리나라 근대의 출발로 보는 학자들이 꽤 있습니다. 정경모, 한영우, 이이화 등이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이 외에도 정지창이나 이규성, 김영철, 조성환이 한국 근대정신의 시작을 동학으로 보았습니다.(주1) 정지창은 독문학자이며, 이규성은 철학 연구자, 김영철은 정시사상사 연구자, 조성환은 동학연구자입니다. 철학, 사상 관련 연구자들이 동학을 근대의 출발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최제우의 사상은 다양한 측면에서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1) 김영철, 「동학. 근대 한국정신의 발로」, 『동학학보』52, 2019, 137쪽. 조성환, 「동학의 재발견, 한국의 근대는 동학으로부터」. 도진순 등, 「한국근대의 기점 논의」, 『역사와현실』9, 1993, 179-204쪽.
접주는 동학교단에서 지역 담당 포교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최제우는 사망하기 직전, 1863년 2월에 흥해에서 16명의 접주(接主)를 임명하고 7월에 거처하던 경주 용담정에 그들을 모아 동학 교리와 조직 운영 등을 교육했습니다. 교세가 갑작스럽게 확대되자 조직을 만들어 대응한 것입니다. 접주란 말은 최제우가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보부상이나 유생들도 동아리라는 의미로 접(接)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그 장을 접장(接長)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최제우는 그런 사례를 염두에 두고 포교 현장에 사용한 것입니다.
동학 접주가 특별한 것은 그들이 동학사상을 장착하고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점입니다. 진주, 영해, 문경 등지에서 총 4차례의 농민봉기를 조직하고 주도한 이필제 접주, 그리고 고부 접주였던 전봉준, 황해도 팔봉 접주 김구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유명한 접주들 외에도 수백, 수천 명의 접주들이 전국에 흩어져서 조선시대 말엽, 일제 강점기 그리고 그 이후로도 활동했습니다.
동학 교단의 2대 교주 최시형, 3대 교주 손병희도 접주의 접주로 활약하였으니 접주들의 영향력은 요즘으로 본다면 종교 조직이면서 사회 운동 조직이기도 하고 나아가 정당 조직이었습니다. 최시형 때에는 확대된 교세에 부응하기 위해서 접주제를 더 확장해 포제와 교구제를 도입하여 운영했습니다. 이러한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에 맞서 광범위한 민중 저항 운동을 조직적이고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강점기 때에도 이러한 저항 운동은 지속되었고 상해임시정부의 설립까지 이어졌습니다. 근대시기의 이러한 민중적, 범국민적 움직임의 시발점에 최제우가 있었습니다.
참고로 보천교를 창시한 차경석도 동학 접주였습니다. 또 동학 접주들이 초기 증산교에 많이 참여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동학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종교입니다. 경제학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나라에서 신종교 시장을 처음 열고, 개척한 사람이 최제우입니다. 그 이후에 증산교(1901년), 대종교(1909년), 원불교(1916년), 보천교(1921년) 등이 등장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신종교들의 가르침과 의례가 동학에서 나왔습니다. 최제우가 시대를 앞서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겠지요.
"가련하다. 가련하다. 아국(우리나라) 운수 가련하다.
전세(이전 세상에서 일어난) 임진(왜란이) 몇 해런고, 이백사십(년 전이) 아니런가.
십이제국(온 세상 모든 나라)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니런가."(안심가)
최제우가 1861년경, 은적암으로 피신하기 전에 쓴 「안심가」입니다. 우리나라 운수가 가련한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240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1592년에 일어났으니 당시로서는 정확히 269년 전입니다. 온 세상에 전염병이 돌고 전화에 휩싸였으니 다시 새로운 세상이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최제우는 부인에게 안심하라며 이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그는 갑자기 왜놈들 욕을 합니다.
"요순성세 다시 와서, 국태민안(국가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지마는
기험(참으로 험)하다. 기험하다. 아국운수 기험하다.
개 같은 왜적놈아, 너희 신명(신세) 돌아보라.
너희 역시 하륙(육지에 올라와서, 즉 침략)해서 무슨 은덕(이득이) 있었던고"
옛날 일본이 침략한 사실을 말하면서 우리나라 운수가 앞으로 험하다고 예언을 합니다. 일본의 침략을 예견한 것입니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 “무력 준비를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즉시 홋카이도(蝦夷)를 개척하고 제후를 봉건해 캄차카반도와 오호츠크를 빼앗고, 오키나와(琉球)와 조선(朝鮮)을 정벌한 후 북으로는 만주(滿州)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루손일대의 섬들을 노획해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한 진취적 기세를 드러내야 한다”(『유수록(幽囚錄)』)고 주장한 것이 1954년입니다. 이미 일본에서는 정한론이 점점 퍼지기 시작하였을 때 최제우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전세 임진 그때라도, 오성(이항복) 한음(이덕형) 없었으면
옥새보전 누가할까? 아국 명현(名賢, 현명하고 이름 높은 사람) 다시 없다.
나도 또한 한울님(하늘님)께 옥새 보전(하라는) 봉명(명을 받음)했네"
자기 자신도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이항복과 이덕형처럼 국가를 위해서 봉사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것을 천명으로 받았다고 합니다. 최제우의 이러한 선언이 이후 이어지는 동학 농민 운동과 천도교가 이끄는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최제우는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는 신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말을 무시하고 생각해 보면, 그는 아마도 당시 조선의 민중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요시다 쇼인은 1858년 경에 조선에서 들어오는 소식을 듣고 중국에 커다란 반란(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태평천국 반란은 1851년에 일어나서 1864년에 종료되었습니다. 당시 조선 민중들은 해상을 통해서 전해지는 주변국들의 소식을 듣고 세상이 변란에 휩싸이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움직임도 틀림없이 조선 민중들에게 전해졌고, 최제우는 거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한글로 쓴 시가로 <용비어천가>(1445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시가 입니다. 이후 조선시대 말엽에 천주교 신부 최양업이 한글로 다음과 같은 천주 가사를 써서 교인들에게 배포했습니다.
"우리 인생 바랄 것이 이곳 밖에 다시 없네.
세상 만복 다 받은 들 천당 복에 비길소냐.
인간 고초 다 당한들 지옥 영고 비할소냐"(<사향가>)
최양업은 1850년대와 60년대에 전국을 떠돌며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최제우도 이 시기에 전국을 떠돌아다녔고 천주교에도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이런 한글 가사를 보고 읽었을 것입니다. 1862년 임술년에 진주, 단성 등지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 과정에서도 한글 통문이 등장했습니다. 최제우의 <용담유사>에 보이는 한글 가사들은 위에 소개한 것을 모방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글은 1443년 탄생 이래로 줄곧 언해, 언글, 암클, 아햇글, 어린아이 글, 속된 글, 상말(상놈들의 말) 등으로 천대를 받아왔습니다. 그런 전통이 400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용담유사>의 한글 사용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글이 처음으로 종교 경전의 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용담유사>의 글이 집필될 당시에는 그것이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쓰고, 암송하는 중요한 경전이 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중요한 경전은 모두 한문으로 써져 있습니다. 유교경전도 그렇고 불교경전도 그렇습니다. 지식인들은 이런 경전을 배우고 암기하여 관공서 일이나 실생활에 활용하였습니다. 그래서 보통 중요한 글, 혹은 격조 있는 글, 나아가 사상과 철학을 논하는 글은 한문으로 쓰는 것이 우리 사회의 전통이고 불문율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한글은 창제된 이래로 극히 좁은 범위 내에서만 활용되었고 공공기관의 문서에는 감히 올라가지도 못하는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한글이 <용담유사>를 통해서 탄생 이후 처음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물론 온통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 보다는 다소 격이 떨어지는 <용담유사>입니다. 최제우는 사상적이고 철학적인, 중요한 내용은 <동경대전>에 담았습니다. <용담유사>에는 아내에게 쓴 글, 제자들에게 쓴 글,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 감동을 적은 글이 담겨있습니다. 그래도 거기에는 개벽사상, 개혁사상, 민족주의 사상, 평등사상 등이 생생한 한국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한글을 사용하여 모든 것을 표현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천주 조화정(侍天主 造化定), 영세불망 만사지(永世不忘 萬事知)"
최제우가 1860년에 만든 동학 주문(13자 본주문)입니다. '천주(하늘님)를 모시면(侍), 조화(造化, 기적)가 이루어지고(定), 영원토록 잊지 않으면(永世不忘) 모든 일을 알게 된다(萬事知)'는 의미입니다. 하늘님을 모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마음속에 신을 모셔라는 뜻으로 동학 주문을 반복해서 외움으로써 특별한 깨달음의 체험을 하라는 것입니다.
최제우는 위와 같은 주문을 동학에 입문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권했습니다. 양반이든지 상놈이든지, 귀한 사람이든지 천한 사람이든지, 누구나 주문을 외워서 하늘님을 모시면 '그날부터 군자되어 무위이화(無爲而化, 저절로 세상 일이 이루어짐) 될 것'(「교훈가」)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조선시대의 말로 바꿔보면 누구나 양반이되고 누구나 관리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제자 최시형이 이어받아 '사람은 하늘이다.(人是天) 사람 섬기기를 하늘 같이 하라'(「대인접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사상으로 발전시키고 나중에는 손병희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천도교의 종지로 삼았습니다. 인내천은 다름 아닌 평등사상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가 되는 평등사상의 씨앗을 최제우가 뿌렸다는 점에서 그는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등을 이야기하면서 남녀평등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제우는 자기 부인에게 쓴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숙한 내 집 부녀, 이 글 보고 안심하소 "
"거룩한 내 집 부녀, 자세 보고 안심하소."
"거룩한 내 집 부녀, 근심 말고 안심하소."
최제우는 자신의 동학 포교 활동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하는 부인을 위해 「안심가」를 쓰면서 위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현숙하다는 말은, 마음이 어질고 정숙하다는 뜻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훌륭하고 고귀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기독교에서 많이 쓰는 것으로, 성스럽고 위대하다는 뜻도 있습니다.(주1) 아내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이런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글로 부인을 위해 각별히 정성을 들여 글을 쓴다는 것이 최제우만의 일은 아닙니다. 조선의 선비들은 의외로 자기 아내를 애틋하게 사랑하고 존중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박동욱 저, 『눈썹을 펴지 못하고 떠난 당신에게 - 아내를 잃고 띄우는 조선 선비들의 편지』(궁리, 2022)에는 그런 이야기들 많이 실려있습니다. 최제우는 자신이 부인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그도 그렇게 아내를 사랑한 사람들 중 한 사람입니다.
최제우가 여성에 대해서 얼마나 평등한 생각을 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생전에 노비를 해방하여 며느리와 수양딸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옵니다. 그의 여성 평등관에 대해서 적극적인 평가를 보류하는 연구자들도 있습니다.(주2) 최제우도 조선시대 남성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남존여비 사상에서 크게 벗어나서 여성 평등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을 받고 그가 여성들에 대해서 보여준 모습을 목격한 제자들에 의해서 우리나라 여성 평등의 사상이 크게 발전해 왔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최시형은 어느 날 청주를 지나다가 제자 서택순의 며느리가 베 짜는 소리를 듣고 "저것은 누가 베를 짜는 소리인가" 묻고 서택순이 제 며느리가 짜고 있다고 답하자, 그것은 하늘님이 베를 짜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내수도문」에서는 여성들에게 "부모님께 효를 극진히 하오며, 남편을 극진히 공경하오며, 내 자식과 며느리를 극진히 사랑"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당시는 고부간의 갈등으로 여성들이 시어머니의 핍박을 받는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1894년에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전봉준의 농민군이 조정에 제시한 폐정개혁안 가운데에는 '청춘과부(靑春寡婦)의 개가를 허락할 것'을 요구하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이후 서양에서 전해진 여성 인권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천도교에서는 더 적극적인 여성 해방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여성 평등이라고 하는 커다란 근대적 과제가 최제우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시도되었기 때문에 이점도 최제우가 시대를 앞선 것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1) 박재언, <고어사전-낙선재 필사본 번역고소설을 중심으로>, 이희문화사, 2001.
주2) 양삼석, 「수운(水雲) 최제우의 남녀평등관」, 『민족사상』(6)4, 2012, 157쪽.
민족주의란 아주 오래된 고대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대 민족주의는 특수한 개념입니다. 이것은 민족주의가 근대국가 건설과 결합된 형태로, 서양에서 17세기 경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유럽에서 1618년부터 1648년까지 30년간 큰 전쟁이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의 황제국), 스페인, 덴마크 등 가톨릭 국가들에 맞서 개신교 국가들이 반기를 든 전쟁이었습니다. 30년 전쟁이라 불립니다. 이 전쟁의 결과 유럽 국가들 사이에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여기에 주권 국가(sovereign state)의 개념이 처음 등장합니다. 각국은 자국의 영토와 영토 내의 모든 것을 통제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주권 국가란 자기 나라 영토 내에서 절대적인 주권을 행사하며,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는 나라입니다. 또 그 국가는 자국 내에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 타국과 외교를 추진할 권리, 조약을 제정하고 필요시 전쟁을 수행할 권리를 갖습니다. 이전에는 가톨릭의 최고 지도자, 즉 로마 교황만이 이런 권리를 가졌습니다. 당시 유럽의 중세시대에 여러 나라(공국)들은 제한된 주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각 나라는 교황이 권위를 부여한 통치자가 통치를 했습니다. 마치 동양의 중국 중심 천하세계에서 조선의 국왕을 중국의 천자가 책봉하는 것과 같습니다. 조공체제라 불리는 이런 시스템에서 조선은 중국에 조공을 받치고 중국은 조선에 천자의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평화적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서양 중세를 지배한 종교가 기독교(가톨릭)였다면 동양에서는 유학, 특히 성리학이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최제우는 <포덕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신년(1860년)에 이르러 전해오는 소문이 있었다.(至於庚申, 傳聞) 서양사람들이 천주의 뜻이라 하여 (西洋之人, 以爲天主之意) 부귀는 취하지 않고(不取富貴) 천하를 쳐서 빼앗아 그 교당을 세우고(攻取天下, 立其堂) 그 도를 행한다고 한다.(行其道) 그래서 나도 그럴 수 있을까(故吾亦有其然) 어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있었다.(豈其然之疑)"
1860년이란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원명원을 약탈한 때를 말합니다. 이런 소식과 함께 최제우는 서양인들이 중국인들의 재산은 빼앗지 않고 오히려 교회당을 세워서 포교활동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당시 중국에 나타난 영국과 프랑스는 역사에 새롭게 등장한 근대 주권국가들입니다. 이 국가들이 조선 위에 군림하던 천하국가 중국을 멸망시켜 버린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최제우는 "중국이 소멸하면(中國燒滅) 어찌 입술이 없어지는 우환이 없겠는가(豈可無, 脣亡之患耶)"(논학문)라고 했습니다. 책봉국으로서 조선의 안전에 대해 일정 정도 책임을 지고 있는 중국이 멸망해 버린다면 조선은 입술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격변기를 맞이하여 당시 조선 앞에는 3 갈레 길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길은 중국이 여전히 책봉국으로서의 힘을 유지하여 조선은 그 조공국으로 남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중국의 1개 성으로 편입되거나 그 식민지가 되는 길입니다. 두 번째 길은 중국을 정복한 나라, 즉 영국이나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는 것입니다. 아니면 다른 힘 있는 나라의 식민지가 되는 것입니다. 식민지란, 조공국의 근대적인 변형입니다. 결국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자주독립국가로서 근대국가로 재탄생하여 새로운 국제질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자주독립국가가 되기 위해서 조선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조선사람들이 서로 연대하여, 하나의 민족으로서 강력한 공동체의식을 확보하는 것, 두 번째는 그런 의식을 바탕으로 주권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고려시대 때에는 그래도 공동체 의식과 주권 국가 의식이 상당한 수준으로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중국의 조공국으로 600여 년을 편하게 안주한 덕분에 민족주의와 주권의식이 거의 바닥 수준이었습니다. 특히 나라를 이끌어야 할 통치자 계층과 지식인들은 자기 나라가 중국인지 조선인지 구분이 안 되는 상황까지 갔습니다. 자기 나라의 문화와 문명은 비하하고 로마(동양은 중국)의 문명만을 최고로 평가하며, 세계 시민으로서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전형적인 중세 지식인이 그랬습니다. 주자학의 복잡한 이기론은 글자하나 빼지 않고 외우지만 자기 나라의 역사나 문화는 아무것도 모르며, 그러면서도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성리학 선비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최제우는 유독 조선이라는 단어를 자랑스럽게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국호는 조선이오, 읍호(邑號)는 경주로다.
성호(城號)는 월성이오 수명(水名)은 문수(汶水)로다."(용담가)
"곤륜산 일지맥(一支脈)의 조선국 금강산이
기암괴석 좋은 경치(景) 일만 이천 아닐런가"(몽중노소문답가)
"조선에 태어나 살면서 욕되이 인륜에 처하여(生居朝鮮, 忝處人倫) 천지의 덮고 실어주는 은혜를 느끼며(叩感天地盖載之恩) 일월이 비추어 주는 덕을 입었습니다.(荷蒙日月照臨之德)"(축문)
최제우가 조선이라는 단어를 자랑스럽게 사용했다는 사실이 특이한 것은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최한기(崔漢綺, 1803~1879)는 최제우와 동시대를 살았던 학자인데 그는 자기 글 가운데 조선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박학다식한 유학자로 서양의 학술과 문명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인데 그는 오직 중국세계 혹은 천하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자기가 속한 조선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성리학자들도 주된 관심은 중국의 문화와 문물이었지 조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보편적 천하주의자들이고 세계주의자들이었으나,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최제우가 <안심가>에서 일본의 침략을 꾸짖고 또 그것을 경계한 것은 민족적 유대감을 강화하는 발언이었습니다. 또 그는 <절구>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용담에 물이 흘러 네 바다의 근원을 이루고
구미산에 봄이 오니 온 세상이 꽃으로 가득 차네
자기가 사는 지역의 산을 들어 그곳에 봄이 오니 온 세계가 꽃으로 가득 찬다는 발언은 세계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보면 너무 편협하고 지역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사상, 즉 근대민족주의는 바로 그러한, 자국중심적 사상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최제우는 서양사람들이 중국을 공격하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도무지 다른 연고가 아니라(都緣無他), 이 사람들이 도를 서도라 부르고(斯人, 道稱西道) 학을 천주학이라 하며(學稱天主) 교는 성교라 하는데(敎則聖敎) 이것은 천시를 알고(此非知天時而)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受天命耶)"(논학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았으며, 심지어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천황씨'(『도원기서』)라 부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천황씨란 중국의 천자와 같은 존재로 우리나라는 이제 중국의 책봉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최제우는 당시 이름 없는 시골 선비였기 때문에 '헛소리'라고 평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사상이 전체적으로 서구에서 등장한 근대민족주의 정신과 매우 닮아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최제우의 정신을 이어받아 그의 제자 이필제는 1870년 진주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 중국을 치러 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주변사람들의 밀고로 실패했으나 감히 책봉국인 중국을 친다는 것은 바로 전통적인 천하 세계관을 거부하고 독립적인 조선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환구단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습니다. 중국의 천자가 아닌 조선의 황제인 자신이 직접 하늘로부터 주권을 부여받겠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중국의 조공국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주권국가라는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최제우가 사망한 지 33년 뒤의 일입니다.
최제우가 동학을 세운 것은 1862년입니다. 이때 그는 남원 은적암에 숨어서 그동안의 자신의 깨달음을 정리하여 「논학문」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거기에 동학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의 도는 무슨 도라고 부릅니까?"
"천도이니라."
"그러면 서양의 도(서학)와 다른 것이 있습니까?
"서양인의 학(서학)은 우리 도와 같은 듯하나 다르다. 그리고 하늘에 비는 것 같지만 실질적인 효험이 없느니라. 그러나 시운도 같고, 도도 같으나 이치는 다르다."
제자들이 또 물었습니다. "도가 같다고 한다면 서학이라고 부릅니까?"
"그렇지 않다. 내가 동에서 태어나서 동에서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이지만 학은 동학이다. 하물며 땅이 동서로 나뉘었으니 서를 어찌 동이라 이르며 동을 어찌 서라고 이르겠는가. 공자는 노나라에 나시어 추나라에 도를 폈기 때문에 추로의 풍화가 이 세상에 전해 온 것이거늘 우리 도는 이 땅에서 받아 이 땅에서 폈으니 어찌 감히 서학이라고 부르겠는가."
이러한 문답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동학이 서양의 서학을 대응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최제우가 살아 있을 당시 서학이란 서양의 종교인 가톨릭과 서양의 학문 및 사상, 과학기술을 모두 합한 단어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동학은 중국의 유학을 대신한 학문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그러니 동학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거기에는 철학사상과 과학기술도 함께 포함된 메가 학문이기도 했습니다. 최제우는 이러한 큰 꿈을 가지고 훌륭한 제자들을 모아 가르쳤지만, 성리학만 인정한 조정은 동학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2년 뒤인 1864년에 체포되어 대구 장대에서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처형을 당했습니다.
동학은 서양의 학술·종교 혹은 중국의 학술·종교와 비교해 보면 그 내용이 많이 부족합니다. 깊이도 부족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의 종교, 우리의 학문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종교나 학문 같은 고급문화의 차원에서 처음으로 우리 것을 시도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그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조선 말엽에 학문은 중국의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었습니다. 서양의 것들이 들어오자 또 그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학문이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최제우는 동학을 선포하여 우리가 어떤 것을 귀하게 여기고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런 점에 최제우 '동학'의 의미가 있습니다.
요즘 한류 관련 영상을 보면 백범 김구(1876∼1949)가 했던 말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김구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한평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항상 일본의 순경에 쫓기면서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군사력이 아니라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지고 싶었을까요?
김구는 17세 때 동학에 들어가 다음 해 팔봉 접주가 되었습니다. 접주가 되었다는 것은 열심히 포교를 잘해 많은 신도를 모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교주 최제우의 가르침도 잘 이해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김구가 『백범일지』에 담긴 「나의 소원」을 쓴 것은 1947년입니다. 「나의 소원」 안에「내가 원하는 우리나라」가 담겨 있습니다. 1947년은 백범이 사망하기 2년 전, 즉 72세 때입니다. 사상이 원숙기에 접어든 때 그는 그런 글을 썼습니다.
김구는 이미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고 그만큼 영향력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젊어서 동학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사실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교나 기독교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에 깊은 애정을 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상해에서 귀국할 때 맨 먼저 의암 손병희의 묘소를 찾아가서 참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의암이 없었다면 3·1 운동도 없었다"라고 손병희를 3·1 운동의 주역으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예전에 동학교도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함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말한 '높은 문화의 힘'은 어디에서 나온 사상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독창적인 사상일까요?
최제우는 서양사람들이 중국에 침략한 사실을 소문을 통해 들었습니다. 서양사람들이 중국을 침공하니 그들을 당할 사람이 없고 그들이 중국에서 못하는 일이 없는데 어찌해서 그럴 수 있을까 하고 궁금해했습니다. 그리고 최제우가 내린 결론은 서양인들이 "천시를 알고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此非知天時, 而受天命耶)"(「논학문」)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서양인들의 군사력이 뛰어난 것을 보지 않고 그들이 중국에서 도를 이루고 덕을 세운 것(西洋之人, 道成立德)을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천주의 뜻이라 하여(西洋之人, 以爲天主之意) 부귀함을 취하지 않고, 천하를 빼앗아 거기에 교회당을 세우고 도를 행한다(不取富貴, 攻取天下, 立其堂, 行其道)는 것을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포덕문」)
그래서 최제우는 스스로 수련을 통해서 천명을 받기를 노력하였고 그 결과 하늘님의 천명을 받았다고 선언했습니다. 그가 말한 하늘님의 천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에게 영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吾有靈符, 其名仙藥)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其形太極, 又形弓弓)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受我此符, 濟人疾病)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受我呪文, 敎人爲我則)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汝亦長生, 布德天下矣."(「포덕문」)
이것을 황당한 계시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혹은 과대망상에 빠진 한 미치광이의 헛소리라고 폄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하고 싶은 것은 최제우가 하늘에 구한 것은 군사력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질병에서 건지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을 구했습니다. 그러면 천하를 얻을 수 있는다는 것입니다. 강력한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장악하고 중국을 평정하고 나아가 세상을 정벌하는 꿈이 아니라 '문화'를 통해서 천하를 얻는 꿈, 그것이 최제우의 꿈이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제우의 이런 꿈을 제자 최시형을 이렇게 재해석했습니다.
"우리 도의 운수로 인하여 우리나라 안에 영웅호걸이 많이 날 것이니, 세계 각국에 파송하여 활동하면 형상 있는 한울님이요, 사람 살리는 부처라는 칭송을 얻을 것이니라."(「개벽운수」)
"포덕사를 세계각국에 파송하면 모든 나라가 자연히 천국이 되리라."(「개벽운수」)
포교를 중시하는 종교인들이기 때문에 포교차원에서 위와 같은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제치하에 있으면서 백만 명이 넘는 동학교도(천도교인)들이 매일 보는 경전 안에 이런 가르침이 들어있다는 것은 그만큼 각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랐던 것은 군사력이 아니라 강력한 '문화의 힘'이었습니다. 물론 종교인들이었기 때문에 '종교 문화의 힘'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동학은 종교신앙과 학술이 결합된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학교도들이 원했던 문화의 힘은 김구가 말한 '한없이 높은 문화의 힘'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있어서도 최제우는 김구의 스승(최시형)의 스승이었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이 말은 1990년대 초 광고 문구로도 사용되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한류가 유행하면서 K팝, 드라마, 화장품, 한식, 의류, 라면 등 수많은 상품들이 세계적으로 흥행하면서 당연하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전통시대, 예를 들면 조선시대에 이 말은 전혀 맞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세계적인 것은 중국의 것이었고, 가장 한국적인 것은 가장 가치 없는 것, 가장 부끄러운 것으로 폄하되었습니다. 심지어 조정에서 정책을 논할 때도 중국의 정책을 바탕으로 논했고, 법률은 중국의 것을 가져다 수정해서 썼습니다. 최제우는 여기에 반기를 든 사람입니다.
최제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운수야 좋거니와 닦아야 도덕이라.
너희라 무슨 팔자 불로자득(不勞自得) 되단 말가.
해음(분별)없는 이것들아 날로 믿고 그러하냐.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을 믿어스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 하단 말가."(「교훈가」)
이 글은 최제우가 1861년 겨울, 남원 은적암으로 피신할 때 지어 제자들에게 보낸 글입니다. 한울님을 믿고, 시천주를 통해서 각자의 몸에 한울님(천주)을 모셨으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곳에서 취하는(捨近取遠)' 잘못을 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최제우는 제자들에게 자신은 멀리 피신을 가니 자신을 믿지 말고 스스로 종교적 수양을 열심히 하라는 당부를 이렇게 시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좀 더 확장해서, 상징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우 종교적이지만 종교적인 내용을 배제하고 생각해 보면,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가르침입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진리를 먼 곳(서양이나 중국)에서 구하지 말고 자기 안에서 찾아라는 것입니다.
최제우의 아버지 근암공 최옥(崔鋈, 1762-1840)은 과거 공부를 하던 선비였습니다. 최옥은 첫째, 둘째 부인을 일찍 사별하고 과부를 얻어 최제우를 낳았습니다. 최제우는 10살 때 어머니와 사별하고, 13살 때 결혼을 한 뒤, 17살 때 부친과도 사별했습니다. 18살 때는 집안에 불이나 세간살이를 모두 잃었는데 이때 부친의 한문 서적도 모두 불에 타버렸습니다. 21살 때(1844년) 울산 처갓집에 가족을 맡긴 뒤, 10여 년간 전국을 떠돌아다녔습니다. 원래 한학자인 부친을 따라 유학 서적을 읽고 과거시험에도 관심이 있었으나 서자 출신이기 때문에 자격이 없었습니다.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익혀 무과시험에 도전해보려고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한창 젊은 20대의 나이에 전국을 방랑하며 먹고살기 위해서 온갖 잡일을 다 했습니다.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해보기도 하고, 백목을 팔거나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 병도 고쳐보고, 점도 쳐보고, 철공소를 차려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그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 세상 일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시대를 앞선 최제우의 각종 사상은 바로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거리에서 시장에서 그가 보고 들은 것들이 그의 새로운 사상의 재료가 된 것입니다.
최제우는 1856년에는 천성산 적멸굴에 올라가 49일 동안 기도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859년 가을에 구미산 용담정으로 들어가 살다가 다음 해 4월 신기한 체험을 하고 천명을 받아 득도를 했다고 합니다. 종교체험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에 따르면 종교체험은 아주 짧은 시간에 어떤 황홀한 감정에 휩싸이는 체험이지, 지적인 활동은 아니라고 합니다. 최제우는 하늘로부터 받은 천명에 대해서 여러 가지 글을 써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비한 체험 뒤에 정리해서 만들어 낸 것이지, 체험을 통해서 그가 하늘로부터 구체적인 어떤 가르침을 직접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서술한 득도체험의 기록이 작품마다 다른 점이 이것을 반증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는 20대 때 전국을 다니면서 많은 것들을 보고 들은 뒤에 30대 때 고향으로 돌아와 깊은 사색을 시간의 보냈습니다. 그것이, 1860년에 겪은 이상한 득도체험을 전후로 정리된 것이 그의 동학사상입니다. 그의 사상은 그의 작품이 연달아서 나오게 되는 1860년에서 1863년 사이에 정리되었습니다. 종교체험 뒤에 그는 자신이 신을 만났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그에게 강한 자신감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것에 동력을 얻어서 그는 동학 창설과 함께 과감한 포교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863년 11월(음력)에 급파된 관헌에 의해 경주에서 제자들 2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압송된 뒤 다음 해 3월에 처형당했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최제우의 여러 가지 사상을 살펴보면 그는 결국 우리 안에 길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외국으로 유학을 가지도 않았고, 기존의 어떤 학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지도 않았습니다. 한문 서적을 깊이 있게 연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최제우는 몰락한 양반의 서자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모든 것이 불에 타 재산도 한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고통에 함께 공감하고 깊은 사색에 몰두했습니다. 스스로 힘은 없지만 나라를 보존하고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 계책에 대해서 항상 고민하고("輔國安民, 計將安出", 포덕문) 큰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젊은 시절 눈과 귀를 활짝 열고 떠난 세상 여행에서 그는 한문과 낡은 지식에 빠진 지식인들이 보지 못한 세상을 목격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근대는 최제우가 목격한 바로 그런 세상, 즉 서민들이 사는 세상에서 출발했습니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최제우의 동학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