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이야기
오늘은 토요일입니다. 알람을 듣고 눈을 떴습니다. 새벽 6시입니다.
일어나면서 새삼스럽게 마라톤 참가가 잘하는 것인가 의문이 생깁니다. 이 나이 먹고... 망설여집니다. 두렵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미 결정한 일. 아침을 먹고 출발해야 합니다. 8시 전까지는 뚝섬 유원지 대회장에 도착해야 합니다. 9시에는 출발선에 서야 합니다.
식사를 하면서 준비물을 챙겼습니다. 시골에서 작업할 때 쓰던 검은색 안경, 나사못을 담아 쓰던 허리 가방, 그리고 물 한 병을 가방에 집어넣었습니다. 운동화는 신고 다니던 것을 그냥 신기로 했습니다. 양말도 아무거나 주워 신었습니다. 그런데 셔츠는? 여기저기 뒤져봅니다. 아무래도 셔츠는 제대로 된 것을 입어야 할 것 같습니다. 번호표도 달고 남들 눈에 띄기 때문입니다. 여기저기 옷을 찾다 선반 위에서 옷상자들을 모두 내려 찾았습니다. 파란 색의 얇은 셔츠 한 장을 찾았습니다. 긴팔의 스포츠용 셔츠인데 아내가 입던 옷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11월 18일. 5년 4개월 전에 저는 아내와 영영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내가 쓰던 물건을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며칠 전에 아내가 사용하던 운동기구를 버렸습니다. 아이들도 이제는 제 곁을 떠날 때가 되었으니 이제는 유품을 정리해야 합니다. 한 번은 아내 옷을 버렸다가 다시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저도 남은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바지는 무엇을 입지? 반바지 하나를 찾아서 가방에 넣었습니다. 벌써 7시가 지났습니다. 서둘러 집을 나섭니다. 온도를 재보니 영하 4도입니다. 평소에 입고 다니던 잠바를 걸치고 나왔는데 잘못했습니다. 뛰다가 혹시 추우면 꺼내 입으려고 가방 안에 넣어둔 얇은 잠바를 꺼내 입었습니다. 이렇게 추우니 대회본부에서 따뜻한 외투를 입고 오라고 공지를 보낸 모양입니다. 이미 나왔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마스크를 썼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7호선 뚝섬 유원지 역에서 내렸습니다. 이미 8시가 지났습니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서둘러 대회장으로 갑니다. 이미 사람들은 번호표를 받고 자기 물건을 정리하여 물품보관소에 맡기고 있습니다. 옆에는 구급차가 한 대 서 있습니다. 긴장이 됩니다. 당장 현장에 와보니 다리 힘이 빠집니다. 한 번도 안 해본 일이라 생소하기도 하고 별세계에 잘못 온 것 같습니다. 괜히 사람들 눈치를 봅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왔으니 어색하기도 합니다.
참가자는 수백 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천 명이 넘을까? 아주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적은 것도 아닙니다.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20대, 30대입니다. 간혹 50대도 보였지만 10명 중 1명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60대 이상의 노인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사람은 머리가 하얀데 검은색 선글라스를 썼습니다. 허리 가방 꽤 큰 것을 단단히 매고, 번호표를 가슴에 달고 맨손 체조를 하고 있습니다. 몸에 딱 붙는 바지에 양말과 운동화가 잘 어울리고 달리기에 딱 좋게 보입니다. 차림새가 빈틈없으니 날렵하면서 강인한 느낌을 줍니다. 사방을 둘러보면서 몸을 푸는 모습이 마치 서양 영화에 나오는 베테랑 경호원 같기도 하고 이태리 영화에 등장하는 마피아 보스 같기도 합니다. 혹시 대기업 사장님은 아닐까? 사방을 둘러보는 포스가 자신감 넘치고 대단합니다. 백발의 노인이기 때문에 더 멋이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준비 본부에서는 번호표와 얇은 천으로 된 작은 등가방 하나를 주었습니다. "그럼 내가 가지고 온 가방은 맡기고 이 등가방을 메는 것인가? 휴대폰과 지갑도 여기에 담나?" 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살펴보니 그 등가방을 메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 나도 저 멋진 노인처럼 허리가방을 차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반바지를 내서 입으려고 하니 너무 추워서 엄두가 안 납니다. 반바지 입은 사람들도 거의 없습니다. 반바지를 입었더라도 그 밑에 레깅스를 입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그냥 양복바지를 입고 뛰자." 휴대폰도 평소 하던 대로 그냥 바지 뒤에 꼽고 뛰어야겠습니다.
9시가 되니 하프 팀, 10킬로 팀이 먼저 출발합니다. 5킬로 달리는 사람들은 맨 나중에 만세 삼창을 하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잘 달리는 사람들이 먼저 빠지니 5킬로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로소 눈에 들어옵니다. 가족적인 모습입니다. 어떤 부부는 유모차를 끌고 갑니다. 엄마 아빠를 따라온 초등학생들도 있습니다. 어린 여학생들도 많고 귀에 헤드폰을 끼고 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걸어가면서 서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달리면서 장난을 치는 커플도 있습니다. 그냥 일치감치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조금 뒤쪽에서 천천히 달렸습니다. 그러다 어떤 사람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 사람은 걷는 것보다는 조금 빠르게 꾸준히 달리는 사람입니다. 그 뒤를 따라 달리면 아무래도 힘이 덜 들것이기 때문입니다. 한참을 그렇게 달리다 보니 조금은 자신감이 붙어서 그 사람을 추월하여 달렸습니다. 오른쪽으로는 바다같이 넓은 한강이 보이고 그 끝에 높이 솟은 롯데타워가 보입니다. 가끔씩 쌀쌀한 바람이 불었지만 달리다 보니 시원한 바람이 되었습니다.
언덕이 나왔습니다. 20도 정도 경사진 곳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걸어서 올라갔습니다. 그러다 내리막 길이 있고 다시 평지입니다. 저는 마라톤 대회하면 큰 도로에 차량을 막고 하는 줄 알았는데 이 대회는 그런 규모는 아닙니다. 한강변의 자전거 도로 한쪽 인도를 이용한 마라톤이었습니다. 달리는 도로가 좁기는 했으나 사람들 달리는 속도가 제각각이니 서로 부딪힐 정도는 아닙니다. 달리다 보니 아까 제가 뒤를 따랐던 사람이 저를 추월해 갑니다. 그 사람은 정말 변함없이 천천히 달립니다.
어느덧 5km 코스의 반환점을 돌고 온 사람들이 반대편 길에 나타났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 중 마스크 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자 쓴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모두 열심히 뛰어서 인지 헉헉거리며 정말 마라톤 하는 사람들 같습니다. 반환점까지 왔습니다. 저도 마스크를 벗었습니다. 반환점에서 주는 물을 한 잔 마시고 이제 되돌아갑니다. 지금까지 생각보다 힘들지 않고 부담이 없었습니다. 천천히 달리면서 저를 추월한 그 사람을 다시 쫓아가 추월했습니다. 어쩐지 힘이 나는 것 같아서 속도를 조금씩 높였습니다.
중학교 때 100미터 달리기 연습하던 때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학교 육상 선수가 우리 반에 있었습니다.
"야! 너 왜 발뒤꿈치로 달리냐? 그러니까 하늘 보고 달리지."
그 친구가 자세를 교정해 주면서 말합니다.
"앞으로 고개를 숙여! 더 숙여서 허리 각도가 땅 하고 45도가 되게 만들어!"
"그럼 앞으로 쓰러지지."
"그러니까 그때 빨리 달리란 말이야. 그럼 안 쓰러지지. 달릴 때는 발바닥 앞쪽만 사용해. 땅을 뒤로 세게 밀쳐내. 이렇게 박차는 거야!"
그는 발바닥 앞부분으로 땅을 뒤로 세차게 밀면서 설명했습니다.
"이렇게?"
"그래. 그렇게 박차. 그러면서 반대편 무릎은 네 가슴을 때릴 정도로 들어 올려. 왼발로 땅을 박찰 때 오른발 무릎은 최대한 네 가슴 가까이 들어 올려. 그리고 오른발로 땅을 박찰 때는 왼발 무릎이 또 네 가슴 가까이 올라가야 돼. 그것을 반복하는 거야. 그리고 손은 주먹 쥐지 말고 날렵하게 펴! 그걸로 바람을 가르고 나가는 거야."
그러면서 그는 탁탁 탁탁 땅을 치고 쏜살같이 달려 나갔습니다. 달리는 모습이 마치 경주 말 같았습니다.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날랐지요. 그는 높이 높이, 퉁퉁 퉁퉁 뛰면서 달렸기 때문에 포폭도 무척 넓었습니다. 그래서 100미터를 우리들이 16초, 20초 동안 달릴 때 그는 10초가 조금 넘을 때 끝냈습니다.
마라톤을 달리다가 갑자기 그가 말 한대로 따라 해 봤습니다. 발바닥 앞 쪽만을 사용하고 무릎을 높이 높이 들면서 뛰었습니다. 하지만 100미터도 달리기 전에 발등 근육이 아프고 종아리 아래쪽이 찌릿찌릿했습니다. 그동안 그쪽 근육을 전혀 쓰지 않았으니 잘못하면 근육이 끊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천천히 걸었습니다. 조금 걷다 보니 또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달리던 그 사람이 저를 추월했습니다. 그 사람은 이제 속도를 더 빠르게 달리나 봅니다. 아니면 제가 더 느려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점점 더 그와 거리가 멀어집니다. 저는 중학교 친구 흉내 내다가 남은 힘을 다 써버렸습니다. 결국 뒤늦게 골인을 하고 5km 완주 메달을 받았습니다.
시간을 재어 보니 저는 40분 만에 들어왔습니다. 10km 달리던 사람들도 지금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저보다 2배 빠른 속도로 달린 것입니다. 5km를 보통 걸음으로 걸으면 70분, 80분이 걸리니 저는 걷는 것보다는 2배 빠른 속도로 달린 셈입니다. 10km 달린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 중간에 속도 경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선수들이니 속도 경쟁이 있겠지요. 저도 속도를 더 높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다음 달 12월에도 마라톤 참가신청을 해두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준비를 잘할 생각입니다. 운동화와 양말은 달리기에 적합한 것으로 새로 사고, 운동용 바지도 얇고 달리기 편한 것으로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발 목과 발바닥, 그리고 발 등과 허벅지, 종아리 근육을 더 단단하게 훈련을 하고 무릎을 좀 더 높게 들 수 있게 노력해야겠습니다. 보폭도 좀 더 넓혀야겠습니다. 친구가 말한 대로 100미터 달리기 연습을 하면 마라톤 할 때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완주하고 결승선에 들어와서 받은 물 한 병과 바나나, 그리고 빵을 화단 한쪽에 앉아서 먹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같이 달리고 같이 앉아 음식을 먹으니 나름대로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구급차는 여전히 한쪽에 서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운동하기에 이렇게 좋은 환경이 없습니다. 옆에 구급차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으니까요. 조금 무리해서 달리더라도 혹시 쓰러지면 바로 사람들이 달려들 것이고 대기한 구급차가 달려오고... 가까운 병원에 10분도 안 돼서 도착하겠지요. 다음에는 5분에서 10분 정도 단축해 봐야겠습니다. 이제 기록 경신이라는 새로운 운동 목표가 생겼습니다. 마라톤 인생의 시작입니다.